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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롬망간 Dec 06. 2022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

캘리포니아 2022


캘리포니아 2022 - 3.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


소살리토(Sausalito)는 사부작사부작 걷기에 참 좋은 동네였다. 바닷가 길이 길지도 짧지도 않아서 햇살을 맞으며 이리저리 걸었다. 코로나 때문인지 한산해서 걷기에 참 좋았는데, 평소라면 관광객으로 꽉꽉 차 있을 동네였겠다 싶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페리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아 있었기에 마음 놓고 실컷 걸었다. 바다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은 아름다웠고 그 너머로 보이는 샌프란시스코 시내는 멋졌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갈매기는 생각보다 꽤 컸고 바닷가에 있는 뚱뚱한 바다사자 동상은 귀여웠다.


이리저리 걷던 중 갑자기 태평양 바닷물에 손을 한 번 담가보고 싶어졌다. 해변이 있는 게 아니라 바위로 된 방파제 바로 옆이 바다라서 바닷물에 손을 담그기가 쉽지 않았다. 이리저리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하던 중 갑자기 파도가 쳐서 신발이 다 젖었다. 그래, 이런 게 다 재미이고 추억이지. 그렇게 바닷가에 있던 중 뒤를 보니 어떤 사람이 바다 풍경을 찍으려고 엄청 큰 DSLR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빨리 비켜주었다. 그쪽에서는 몸짓으로 고맙다고 인사.


그렇게 바닷가 길을 왔다갔다하며 한참을 걷다가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 아까 봐 둔 햄버거집으로 향했다.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뭐지? 미국에서 나를 부를 사람은 없으니 나를 부른 게 아니겠지 하며 그냥 걸었는데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비니를 쓴 백인 남자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전날 전철에서 동양인 혐오 시비에 걸린 적이 있어서 그냥 무시하고 갈까 하다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길래 일단 이야기는 들어 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오늘 바닷가 풍경 찍으러 나왔거든."

"응."

"근데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어서 널 찍었어."

"뭐?"

"이거 봐봐."


보니 내가 바닷물에 손 담그고 있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큰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내가 바다 찍으라고 자리를 비켜줬던 그 사람이었다. 바다가 아니라 나를 찍고 있었구만.


"전화번호 알려주면 문자로 너한테 사진 보내줄게."

"아... 그래? 근데 나 여행객이라 외국 번호인데 되려나?"


써 놓고 나니 자연스럽게 번호 따는 방법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 사람이 내 번호로 사진을 보내 봤지만 문자만 오고 사진은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더니 그 사람이 "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라며 자기 전화에서 뭔가를 누르고 마이크에 뭐라고 말을 했다. 잠시 후 내 전화로 '你的膠片' (니더 자오피앤, '너의 필름' 이라는 중국어)라는 글과 함께 아이클라우드 다운로드 링크가 왔다. 아, 조금 전에 자기 전화에다가 음성 인식으로 '니더 자오피앤' 이라고 했던 거구나. 성조 때문에 照片(자오피앤, 사진)이 膠片(자오피앤, 필름)으로 잘못 인식된 것 같긴 하지만.


"우와, 너 중국말 해?"

"조금. 쓸 줄은 몰라."

"근데 나 한국 사람이야."

"아 그래? 그러면 스타크래프트 잘 해?"

"하긴 하는데 잘 하진 못해."

"무슨 종족 하는데?"

"프로토스."

"오, 나도 프로토스야."


프로토스가 주 종족이라니 근본이 된 친구임이 확실했다. 길가에서 둘이 셀카를 찍고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바다에 손을 담그고 있는 내 사진은 내가 보기에 특별히 멋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프로토스가 주 종족인 친구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믿기로 했다.


대학생 때 화학 시간에 충돌 이론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반응물들이 서로 충돌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그 중 유효한 충돌도 많아지고, 그 결과 반응 속도가 빨라진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충돌이 다 유효한 충돌은 아니다. 쓸데없는 충돌도 분명 있다. 하지만 반응이 빨리 일어나려면 어쨌든 충돌이 많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비슷하다. 괜히 고백을 했다가 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백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이야기를 나누는 미국의 문화를 생각할 때마다 이 충돌 이론이 떠오른다. 만남 중에는 물론 쓸데없는 만남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많아질수록 재미있는 만남도 많아지고 의미 있는 만남도 많아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미국 문화는 일상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은 문화이다. 나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상대방으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오늘 본 제일 멋진 풍경이 너였다는 말과 함께 바닷물에 손 담그는 내 사진을 얻기도 했고 말이지. 이것이 미국 문화의 역동성이자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겁게 해 주는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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