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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롬망간 Dec 07. 2022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캘리포니아 2022


캘리포니아 2022 - 4.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태평양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캘리포니아 1번 주도(州道), 우리로 치면 지방도를 따라서 하루에 열 시간을 운전했던 날이었다. 도로 바로 옆으로 보이는 절벽과 태평양이 바람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모습은 정말 웅장했고 위엄이 넘쳤다.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새가 날면서 앞으로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떠 있는 특이한 광경을 볼 수 있을 정도였고 파도는 가는 길 내내 어디에서나 무섭고 육중하게 절벽을 때리면서 하얗다 못해 창백한 물보라를 거대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경치가 특히나 멋진 곳에는 vista point라는 이름의 전망 지점들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군데군데 비포장 갓길이 확장된 곳들이 있어서 잠시 내려서 경치를 볼 수 있었다. 경치가 너무 좋아서 중간중간에 계속 멈춰서 경치를 보다 보니 구글 지도에서는 6시간쯤 걸린다고 나온 거리를 가는 데에 시간이 거의 두 배로 걸렸다.


한 4시간가량 운전했을 즈음 조금씩 피곤이 몰려왔다. 근 10년 만에 운전대를 잡아서 긴장이 되어서 그렇기도 했겠고, 4시간이면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고도 남는 시간이니 피곤할 법도 했다. 빨리 어딘가에 내려서 좀 쉬고 커피를 사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가도가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도 없고 차도 없고 집도 없고 가게도 없었다. 더 가다 보니 작은 마을이 있다는 표지판이 나오길래 희망을 갖고 계속 달렸지만 도착했더니 마을 전체(그래봤자 건물 몇 개가 다였지만)가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운전자들에게 휴게소 역할을 하던 마을이었던 것 같은데 안그래도 오지인 데다가 코로나까지 겹쳐서 사람이 오지 않자 사람들이 다 떠나간 것 같았다. 희망이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고 정신은 더더욱 멍해져만 갔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차 안에 짐을 놓고 주차해 놓으면 창문 깨고 훔쳐가는 나라에서 차를 갓길에 대고 잠시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 달리면서 빨리 마을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한국이었다면 아무리 산간 벽지여도 이 정도 달렸으면 모퉁이를 도는 순간 한방 오리백숙이나 옻닭 집 정도는 나왔을 텐데 정말이지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길을 계속 달리다 보니 이제는 화장실까지 급해져 왔다. 그래도 화장실이 급해지자 그 덕에 잠은 좀 깼다. 이런게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건가. 하여튼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고 그저 살기 위해 계속 운전을 했다. 나중에는 머리가 멍한 것을 넘어서서 온 몸의 감각이 다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즈음 갑자기 반대편 차선 쪽으로 앞에 주유소가 보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주유소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힘을 내서 주유소로 들어갔다. 주유소로 들어가 차를 대고 내리는 순간 긴장이 확 풀리며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가게가 있었다. 미니 마트(mini mart)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문이 잠겨 있어서 순간 당황했지만 다행히 몇 분 후 주인 할아버지가 와서 문을 열어주셨다. 이미 커피로 해결될 정도의 피곤이 아니었기에 레드불을 샀다. 가격이 엄청 비쌌지만 그 곳 까지의 운송비를 생각하면 납득이 갔다. 계산을 하려는데 기념품용 냉장고 자석이 보였다. 자석에는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I survived Pacific Coast Highway)'라고 쓰여 있었다. 태평양 해안 도로(Pacific Coast Highway, PCH)는 캘리포니아 1번 주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 길 운전하는 게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었구나, 다들 이쯤 오면 힘들어서 제 정신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공감가는 문구에 이끌려 그 냉장고 자석도 같이 샀다.


지금까지 살면서 학교에서건 사회에서건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라는 관점과 자연은 보호의 대상이라는 관점, 이 두 관점만을 배우고 접해 왔다. 글쎄, 사회 전체나 인류 전체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그 날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자연은 정복의 대상도 보호의 대상도 아닌, 내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자연 속에서 정복이나 보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면서 새삼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의 존엄성을 믿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사람이 자연을 두려워하거나 경외(敬畏)까지 하게 되는 것은 너무 과한 것이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대자연 속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는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 역시 한다. 그러고 나면 매일매일의 비슷한 일상 속에서도 냉장고에 붙어 있는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자석을 볼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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