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중2병을 변호한다

롹덕후 찐따 아줌마의 고백

by 악어엄마

내가 다닌 학교는 범생들이 다니는 곳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그 당시 학교는 뜨거운 "롹 스피리트"로 가득했다. 학교 최고 인기학생들은 기타, 드럼, 베이스를 하나씩 맡아 밴드를 만들었다. 그 아이들은 위에는 교복, 바지는 체육복을 입고 중2병 음악의 최고경지라고 할 수 있는 라디오헤드 Creep을 아무렇지도 않게 강당에서 전교생 앞에 나가서 목이 터져라 불렀다.


아이들끼리 CD도 많이 돌려가며 들었는데 Nirvana나 Weezer, Alice in Chains, RHCP 같은 음악이 인기가 많았다 (내 CD 빌려간 너, 나 아직 기억하고 있어. 지금이라도 돌려줘). 교복 입고 홍대로 놀러 가서 당시에 인기 있던 조선 펑크를 듣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진 드럭이란 라이브클럽 위 식당에서는 신기하게 짜파게티를 팔았었다. 친구랑 짜파게티 먹고 지하에 있는 클럽으로 내려가 무대 바로 옆 커다란 앰프에 앉아서 공연을 보곤 했다. 노브레인한테 수능 응원 메시지를 써달라고 부탁하자 내가 학교 책가방에서 꺼낸 연습장에 "재밌게 삽시다"라고 써줬다. 10대 때의 나의 음악 취향은 나중에 결혼하게 된 독일 남자랑 처음 만났을 때 음악 얘기로 3일간 매일 만나 수다 떠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록음악이 내 인생을 바꾼 셈이다.


하지만 요즘 록을 듣는 사람은, 특히 한국에서 "록"도 아니고 "롹"듣는 사람은 찐따란다. 맞다. 누가 요즘 록을 듣겠어. 아니다. 듣는 사람 있다. 오늘 독일 지하철 내 앞자리에 앉은 머리 하얀 아저씨 헤드폰에서 나오던 음악이 록음악이었다. 세월이 야속하게도, 이제 나의 취향은 랩탑 배낭을 메고 성실히 출근하는 저 아저씨의 드럼 비트와 통한다.



새천년을 기다리던 어느 날, 내가 좋아하던 학교 선배랑 우연히 종로에서 만나 영화관에 가게 되었다. 그때 봤던 영화가 바로 무려 18금이었던 Cruel Intentions이다. 선배랑 같이 있다는 것도 가슴이 뛰는데 영화에 나왔던 주제가가 바로 플라시보(Placebo)의 Every Me Every You였다. 플라시보의 전설적 보컬, 브라이언 몰코는 치마를 입고 남자건 여자건 사람을 홀리던 미소년이었다. 몰코는 미국/영국 출신이지만 룩셈부르크에서 자라서 불어가 유창했으며 인터뷰할 때 괴팍하기로 유명했다. 진짜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캐릭터였다.


하지만 브라이언 몰코는 어느 순간부터 콧수염을 기르고 느끼한 달타냥이 돼서 나타났다. 플라시보의 새 음악은 날 선 콧소리로 Nancy Boy를 부를 때의 젊음의 치기와 불안이 싹 사라졌다. 음악에 중 2병이 없다. 멜로디가 예상이 가능하다. 너무 매끈하고 재미가 없다. 가사는 무슨 고등학교 지리 선생님이 쓴 거 같다. 재작년에 플라시보가 우리 집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에서 공연을 했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플라시보가 내 피드에 뜨는 걸 보고 오랜만에 Nancy Boy를 틀어봤다.


맞다. 이랬었지.


사춘기 때 친구들이랑 이어폰을 귀에 나누어 끼고 들으며 감동했던 거의 30년 전의 노래, 그리고 생활에 찌들어서 내가 잊고 있었던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더 많은 노래를 생각했다. 완성된 것도 없고 아직 판단할 필요도 없던. 교복 입고 앰프에 올라가던 그때 그 감각.


한 때 평크 음악으로 유명했던 이 독일 도시에서 나이 먹은 펑크족들을 가끔 본다. 참 지팔지꼰, 어렵게 사시는 구나 싶더라도, 백발을 핑크색으로 염색하고 옹기종기 보도블록 위에 털썩 앉아 있는 저 영원한 중2들은 완성이라는 것은 참 지루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양로원에 들어가 Nancy Boy를 트는 찐따를 상상한다. 그 옛날 전교생 앞에서 Creep을 불렀던 찐따들아, 연락해라. 나 집에 베이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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