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간 세계
토요일, 아이의 한글학교가 끝나자마자 중앙역으로 향했다. 중앙역 바로 옆 시립극단에서 무대 의상을 무게로 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카니발 시즌이 다가오고 있었고, 올해는 플라스틱 냄새나는 아마존에서 산 싸구려 의상을 졸업하고 싶었다. 시립 극단 인스타그램 비디오에서 배우들이 신기한 옷들을 잔뜩 행거에서 꺼냈다. 저건 손으로 직접 만든 거다! 가자! 득템 하자!
중앙역에 도착하자 빨강, 하양, 초록 깃발을 몸에 두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올림픽 개막식이 있었지? 이탈리아 국기인가? 이 도시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이탈리아계 사람들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 자세히 깃발을 살펴보니, 가운데에 금색 사자가 있다. 이란 국기였다. 중앙역 끝에는 이란 정부의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려는 사람들과 경찰들로 가득했다. 이란 국기와 이탈리아 국기는 같은 색이었고, 거의 같은 배열이었지만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축제를 90도로 돌리자 분노가 된다.
앞에서 걷던 키 큰 아저씨 둘이 툴툴거리는 것이 들렸다. 예전에 여기서 쿠르드인들끼리 시위하다가 패싸움이 났다고 했다. 왜 지네 나라 문제를 독일에 가지고 오는 거야? 어쩌다 보니 안 이쁘기로 유명한 중앙역 광장은 온 나라 사람들이 각자의 과거를 전시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독일에 사는 이란인들은 이란을 데리고 오고, 쿠르드 사람들은 쿠르드를 데리고 온다. 터키의 쿠르드, 시리아의 쿠르드, 이라크의 쿠르드. 아무리 멀리 도망간다고 해도 과거의 자신은 현재에 졸졸 따라온다.
나는 인파가 얼마나 많은가 힐끗 보고 시립 극단이 있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떤 의상을 살 건지 아이와 신나서 이야기했다.
어? 저게 줄이야?
1시 15분인데 시작부터 이 정도면, 들어가서 뭘 건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 동네 힙쟁이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그리고 힙쟁이들은 늘 친구가 많다. 한 명이 서 있으면 둘이 되고, 넷이 되고, 일곱이 된다. 자전거를 타고 와서 옆에 붙는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나만 속이 끓었다. 씨부렁거리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누군 시간 남아돌아서 줄 서고 있는 줄 아나.
아이는 세 시간 한글학교 수업 뒤에 또 줄 까지 서느라 지쳐 버렸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앞에 줄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라고 정찰을 보냈다. 아이가 달려가는 걸 보며,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아이를 풀어놓을 수 있을 만큼 아이가 컸다는 생각과 동시에 긴장이 올라왔다. 여기는 유럽 전체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장소다. 1분이 길게 느껴졌다. 노란 모자가 다시 보였을 때야 숨이 내려왔다. “엄마, 사람 진짜 많아.”
남편은 이미 불평을 시작했다. 지금 이 줄이면 우리가 들어갈 때쯤엔 좋은 의상 남은 게 하나도 없을 거라고. 그냥 집에 가자고 했다. 새치기하던 힙쟁이들이 어느새 쇼핑백을 가득 들고 나왔다. 30분을 기다렸다. 이제는 오기다.
결국 남편과 아이를 집에 보내 기로 했다가 아이와 남편의 차표를 내 전화기로 샀다는 걸 기억했다. 남편은 전화기를 잘 들고 다니지 않고, 나는 집 열쇠를 잘 들고 다니지 않는다. 잠깐의 계산 끝에 내 교통티켓도 들어 있는 전화기를 주고 둘을 집으로 보냈다. 공돈이 나가는 거라 쓰리지만 나는 버티기로 했다. “엄마, 난 파란색 아니면 하늘색 사줘.” 아이와 남편이 천진하게 집으로 갔다.
우리 옆에 이란 국기를 두른 사람들이 계속 지나갔지만 시위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고 이 긴 줄이 뭐냐고 물었다. 줄 선지 1시간이 지나고, 2시 반이 되었을 때 겨우 계단 한 층을 올라갔다. 나보다 훨씬 뒤에 서 있던 진짜 아파 보이는 커다란 쉐퍼드가 탄 개모차를 끌던 아저씨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먼저 3층 입구로 들어가는 걸 봤다.
혼자 왔냐고 묻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 의상이라고 해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옷걸이에 남아 있는 건 그냥 평범한 기성복들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특이해 보였던 옷들은 이미 다 팔린 뒤였다. 싸다고 립스틱 묻은 옷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멋쟁이 콧수염은 그냥 벤치에 앉아 있고, 새치기하던 연두색 울프컷 여자는 개의치 않고 극장 무대 한복판에서 바지를 갈아입는다. 여기 내 취향은 하나도 없다.
한 20분 동안 구경하다 그냥 밖으로 나왔다. 아까 그 극장 앞에 긴 줄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란 시위대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싹 정리되어 있었다.
지금 내 휴대폰에서는 뉴스가 쏟아진다. 기괴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이야기들. 나아질 거라고 믿어도 되나? 하우스는 언제나 이긴다는 말만 더 또렷해진다.
왼쪽에서는 정치적 분노가 끓고, 오른쪽에서는 카니발 의상을 향한 나르시시즘이 끓는다. 둘 다 치열하다. 새치기하던 힙쟁이들은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몸은 오른쪽에서 줄을 선다. 나도 시위가 벌어지던 왼쪽이 아니라 축제를 위한 오른쪽에 줄을 섰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거라도.” 세상이 부서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아직 우리 차례는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잠깐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던 날. 오늘도 평행우주는 서로 닿지 않은 채, 그래서 무섭게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