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분홍
오늘은 벼룩시장이 열리는 이달의 첫 일요일이다. 집을 나서기 전에 아들에게 동전 4유로를 고양이 지갑에 넣어주었다. 아들과 에산 안에서 작은 배낭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장난감만 사기로 약속했다. 밖에는 동네 전체에 노란색 수선화가 보였다.
벼룩시장 입구에는 한 단에 2유로라는 커다란 장미 다발을 한 아름 사가는 사람들로 가득이었다. 과일과 야채를 파는 아저씨들도 왔다. 5유로를 주고 포도랑 배 한 봉지씩을 샀다. 예전보다 시장 규모가 작아진 거 같은 기분이지만, 상관없다. 아들은 이미 어디를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9살 남자아이가 엄마와 이모와 함께 유치원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잔뜩 싸들고 나왔다. 이 집의 장난감 좌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전 세계에서 온 부모들이 모국어로 아이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유모차 탄 아이가 포클레인을 더 사야 된다고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많은 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장난감 주인은 꽤 의젓했다. 엄마와 놀다가 쪼르르 나와서 장난감에 관심을 보이는 잠재 고객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다.
장난감 자동차를 한가득 담은 플라스틱 상자 주위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아들은 겨우 자리를 잡아 쭈그리고 앉아 자동차를 골랐다. 그리고 최애 만화영화 포 패트롤 (Paw Patrol) 장난감에 눈을 떼지 못했다. 장난감 상자 안에는 경찰 체이스, 소방관 마샬, 조종사 스카이가 있었다. 다 고르려나 했는데, 스카이만 골랐다. 딱 하나만 산다길래 기특해서 3개를 더 사도 좋다고 했다. 장난감 하나에 50센트라니 엄마는 플렉스 한다.
오랜만에 일요일에 혼자 시간을 보낸 남편에게 아들이 새 장난감을 자랑했다. 아이는 이미 집에 있던 다른 스카이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우리는 스카이, 우리는 쌍둥이야. "하면서 놀았다. 하나는 헬리콥터, 오늘 산 거는 트럭을 몰고 있는 분홍색 스카이다. 남편은 아들이 포 패트롤에서 여자 캐릭터인 스카이를 제일 좋아하는 게 맘에 든다고 했다. 포 패트롤에서 "주연급"으로 나오는 일곱 강아지 중에 여자 강이지는 스카이 딱 하나다. 그리고 스카이는 지상에서는 별로 활약을 하지 않고, 대개 높은 곳에 올라가는 구조 임무가 있을 때 투입된다.
Sir William Hamilton (1730-1803), 1775, British Ambassador to the Kingdom of Naples, by David Allan (1744–1796)
분홍색 스카이를 가지고 노는 아들을 쳐다보며, 남편은 18세기 유럽에서는 남자들이 분홍색을 입었다고 말했다. 여자는 분홍, 남자는 파랑은 20세기에 생긴 관습일 뿐이란다. 원래 그런 건 사실 세상에 별로 없는 듯 하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당신은 분홍색 티셔츠 입을 수 있어?"
"그럼"
"그럼 당신은 분홍색 바지 입을 수 있어?"
"그럼"
"그럼 당신은 분홍색 양복 입을 수 있어?"
"그럼"
"그럼 당신은 분홍색 신발은?"
"흠.. 신발은 쫌 그래. "
꼬마버스 타요 시리즈의 정비사 하나 누나는, 아들의 역할극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중요 인물이다. 그리고 이제 아들에게 정비사는 "누나"이다. 만화 영화 만드는 분들이 이렇게 조금만 신경 써주면 분홍, 파랑 같은 철 지난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생각한다. 실제로는 현재 분홍색 옷이 하나도 없더라도 "있다면" 입고 나가겠다는, 호기로운 장담을 좀 자주 해주었으면 좋겠다. 분홍색 스카이를 고르는 세상의 아들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남자도 분홍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