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에 버터를 바르지 못해 혼난 썰
봄이 되면 독일 유치원에서는 학부모 상담을 한다. 아이의 발달에 대한 3명의 담임선생님들의 평가가 적힌 10장짜리 리포트를 받는다. 한국처럼 키즈노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독일에서는 직접 선생님들에게 묻지 않으면 애가 원에서 뭐 하고 지내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작년에는 한국에 가 있어서 상담을 못 받았으니 거의 1년 반 만에 상담이다.
독일도 유치원 선생님들이 자꾸 그만둬서 사회문제가 되는데, 정말 다행하게도 아이가 만 1세부터 다녔던 유치원에서 세 명의 똑같은 선생님들과 2년 넘게 보냈다. 이쯤 되니 이 선생님들의 성향 역시 나도 파악이 된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유치원의 서비스 정신은 충격과 감동 그 자체였다. 하지만 독일에서 한국 선생님들 스타일로 아이를 이뻐해 주는 것을 기대했다가는 큰코다친다. 바쁠 땐 인사도 안 하는 건 기본이고 (뭐야, 인종차별이야 했더니, 다른 엄마들도 똑같은 얘기를 한다), 미소로 아이들을 둥가둥가 해주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이가 만 2세가 되었을 때 선생님들은 내 아이가 소근육, 대근육 발달이 느리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여기 선생님들은 미소와 함께, 저 어머니 우리 금쪽이 가요,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아주 사무적이고 건조하게 이거 이거 못하니까 고치라고 문제를 말해준다. 그리고 나도 인지부조화가 오는지, 스톡홀름 신드롬인지 이제는 이런 직설 화법에 수긍한다. 아이가 상급반에 올라갈 때까지 똑같은 선생님들에게 전혀 기복이 없이 돌봄을 받을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 상담도 금발머리 다니엘라 선생님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저번과 똑같이 20가지 항목에 대해 아주 건조한 문체로 작성한 리포트를 받았다. 그냥 다 보통, 정상이란다. 눈에 띄는 장점 같은 거, 쫌 엄마 아빠가 다른 사람에게 슬쩍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얘기해주지 않았다. 굳이 리포트를 들춰 들춰 꼽자면 내 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원생들을 잘 배려한다는 것 딱 한 줄이었다. 그리고는 아이의 소근육 발달에 대해 또다시 지적을 받았다. 아이가 혼자서 빵에서 버터를 바를 줄 모르니 여름에 상급반에 올라갈 때까지 집에서 연습을 하라고 했다. 아이가 한국에 작년에 오래 가있었고, 집에서는 젓가락을 사용한다고 항변했지만, 그건 그냥 내 사정이었다. 상급반에 올라가면 선생님들이 빵에 버터 바르기 같은, 우리나라로 치면 밥에다 김 싸 먹기 같은 중요한 생활 능력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니 집에서 열심히 연습시키라고 했다.
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여기 블로그에 써놓고 있지만, 육아 성적표를 받은 엄마는 솔직히 쫄리는게 사실이었다. 아이가 빵에다 버터 못 바른다고 이렇게 지적질이 들어오다니. 왠지 서럽지만 여기는 빵이랑 버터 (Butterbrot)가 밥에 계란프라이/조미김/김치 같은 조합의 느낌이다. 그야말로 매일, 어쩌다 집에 먹을 게 없으면 이 거 가지고 세끼도 먹을 수 있는 궁극의 조합인 거다. 그래, 여긴 독일이야, 인정해야지 싶을 때 다니엘라 선생님은 마지막 킥을 날렸다.
"그래서 금쪽이는 어떤 학원에 다니나요?"
"학원이요? 금쪽이 학원 안 다니는데요."
"스포츠, 미술, 음악 그런 거 당장 시키세요. 학교 가려면 2년 남았다는 것 명심하세요."
난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기가 한국인가 독일인가. 나는 누구인가. 너 다니엘라 선생님을 믿으셔야 하는가. 우리 금쪽이를 빵에 버터 바르는 학원을 보내야 하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