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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Apr 24. 2023

유치원생 독일에서 사교육 하기 (2)

하라쇼 하라쇼

카톡을 돌렸다. 독일 사는 한국 엄마들에게 유치원 상담 내용을 상담하였다. 다들 전혀 놀라지 않는 분위기였다. 우리 동네가 한국만큼 교육열이 높다는 믿지 못할 얘기를 들었다. 만 2~4세 엄마들에게 애들 독일에서 뭐 시키냐니까, 다들 두 개 이상은 하는 거 같다. 발레, 축구, 미술 등등등. 내가 여태 어린아이를 잡는 타이거맘이 아니고 아이의 성향을 존중해서 열심히 놀리는, 그런 개념 있는 엄마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나 싶었다. 한 엄마가 말했다. 전 세계에서 아이들이 지원한다는 빈 소년 합창단을 들어가려면 6살에 합창단도 아니고,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예비학교"를 들어간다는데? 그러려면 애들이 몇 살부터 노래를 연습했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독일 집 주위는 진짜 집이랑 숲 밖에 없다. 한국처럼 커다란 간판을 달은 학원들이 몰려 있는 상가 같은 건 찾을 수가 없다. 한국에 아이와 있었던 곳은 젊은 부부들이 많아 저출산 얘기가 무색하도록 아이들 역시 아주 많았던 서울 근교 신도시였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는 학교를 더 지어야 한다며 주민투표를 독려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도시에서는 아이 사교육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별로 고민을 안 해도 된다. 태권도장들은 어디에 있으며 피아노 학원들은 어디에 있는지, 노란색 학원차가 언제, 어디에 오는지 까지 한국 도착 하루 만에 다 파악이 된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한국 개념의 "사교육"기관이야 말로 엄마의 정보력으로 알 수 있는 것 같다. 구글링을 해봐도 2005년 즈음 만든 거 같은 디자인의 한 페이지 짜리 독일 사교육 기관 웹사이트를 보고 있으면 여기 아직도 영업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는 그 가물에 콩 나지만 남들은 다 한다는 사교육 기관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집 바로 앞 걸어 30초 거리에 있던 커다란 가구 매장이 폐업하고 문화센터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은 코로나 때문에 문화센터를 보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미술이나 운동 수업들은 아이가 너무 어려서 등록 조차 할 수가 없었다. 상담을 다녀오자마자 애를 데리고 문화 센터로 갔다. 등록을 물어보았더니 화요일 하고 금요일에 미술수업하고 무용 수업이 있다고 했다. 여기는 정부 보조금이 나오는 곳이기 때문인지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 한 시간에 7유로, 한 달에 28유로란다. 갑자기 육아 자신감이 뿜뿜 솟았다.


그리고 금요일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 문화센터는 굳게 잠겨 있었다. 벨을 누르니 어떤 분이 걸어오더니 유리문 건너편에서 팔로 엑스자 표시를 한다. "무용 수업 4시요!"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문이 열렸다. 


"부활절 방학입니다. 끝나고 오세요."


아니. 부활절 방학 중이면 밖에다가 뭐 좀 써 놓으면 안 되나? 그게 뭐 힘든 일이라고. 투덜대면서 내려오는데 애를 데리고 헐래 벌떡 뛰어오는 다른 엄마가 보인다. 딱 봐도 나처럼 무용 수업 들으러 온 엄마 같았다.


"부활절 방학이래요. 여기 문 닫았어요."


내 아이 또래의 아이와 같이 온 엄마는 나보고 고맙다고 하면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뒤에서 그 엄마가 이러려고 우리가 이렇게 뛰었냐며 아이에게 볼맨 소리를 하는 것을 들었다. 참으로 독일스럽다.




2주가 넘는 방학이 끝나고 다시 문센 (나도 작년 한국 패치 완료. 흐흐)을 찾아갔다. 다행히 문은 열려 있었고 나처럼 수업을 기다리는 엄빠들이 보였다. 다들 미소로 인사를 했다. 만감 교차다. 너도 사교육의 세계에 들어가는구나. 금쪽이를 데리고 수업이 진행되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공간인지 벽이 없고 대신 커다랗고 무거운 검은 커튼으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금쪽이의 무용 수업이 진행될 곳 바로 옆에는 10대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발레 연습을 하고 있었다. 독일에서의 첫 사교육 수업은 어떨까 두근두근하며 커튼을 열고 들어가자 우리 금쪽이보다 한 두 살쯤 많아 보이는 12명의 아이들이 발레 슈즈에 투투를 입고 훌라후프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딱 한 명 보였다. 금쪽이는 그 모습을 보더니 "엄마, 나 무서워. 나 내려갈래!"라고 하며 계단으로 도망을 쳐 버렸다.


5분 정도 금쪽이와 실랑이를 벌이며 커튼 밖으로 도망가는 아이를 붙잡아왔다. 다른 아이들은 발레 슈즈 같은 것도 준비해 온 것 같았는데, 금쪽이는 양말이 미끄러운지 도망 다니다가 한 번 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했다. 준비물이 뭔지 알려주지 않은 안내 데스크 직원이나 물어볼 생각도 안 한 나나 한심하다고 생각하던 차 선생님이 들어왔다. 금쪽이와 숨바꼭질하던 것이 무색하게 선생님이 금쪽이의 어깨를 손으로 살짝 쓰다듬어 주니 이 녀석 투투를 입은 누나들 사이로 쏙 들어가서 줄을 맞춘다.


한시름을 놓고 다른 부모님들처럼 벽 쪽에 앉아 기다리는데 왠지 수업을 하는 선생님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앗 이거 뭐지 싶은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딱 하나 들렸다. 


"하라쇼, 하라쇼!"


아... 이럴 수가.

이거 러시아어네.


이 수업이 러시아어로 진행될 거라는 걸 얘기 조차 해주지 않은 친절하지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안내 데스크 직원이 원망스러웠다. 근데 더 웃긴 건 러시아 음악에 춤을 추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따라 금쪽이는 신나게 춤을 춘다. 아니, 아까는 무섭다며! 아이는 이제 깔깔 웃으면서 95%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즐기고 있다! 멀리서 보니 선생님이 아이한테 가끔씩 가서 독일어로 지시를 하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이 음악을 바꾸러 컴퓨터 쪽으로 가자, 금쪽이는 러시아어로 뭐라 뭐라 하는 아이들 가운데 쏙 끼어서 웃으며 놀았다.


역시 아이들끼리는 언어란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걸까? 열심히 러시아어로 나오는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에 맞추어 춤을 추는 아이에게 엄지 척을 날려 주었다. 그냥 이 수업 들을까? 누가 알아, 아이가 이러다가 러시아어도 배울지. 근데 요즘 러시아어 하는 게 도움이 되기는 하나. 그래도 러시아어를 하면 폴란드어 같은 슬라빅 언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에이, 그래. 언젠가는 러시아 걔네도 정신 차리겠지. 설마 전쟁이 계속되겠어, 등등등. 아이를 쳐다보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무용 수업이 끝나자 금쪽이는 환하게 웃으며 다음 주에 또 오자고 한다. 그래, 언어가 문제랴. 아이가 재미있어하면 됐지 싶어서, 안내 데스크 쪽에 수업 등록에 대해 물어보러 갔다.


"무용 수업은 어떠셨어요?"

"아이가 좋아하더라고요. 근데요. 이 수업 러시아어인 거 같은데요. 저희 러시아어 못하는데요."

"아, 그게 원래는 그 수업이 독일어로 진행되는데 우크라이나에서 온 아이들이 워낙 많아서요. 그래서 우크라이나어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 그게 러시아어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어였구나. 발레슈즈를 신고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 아이들이었나 싶어서 먹먹해졌다. 전쟁이라는 거 진짜 우리 집에서 30초 거리에 있는 거구나 싶었다. 큰 도움은 못 되더라도 여러 아이들이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신나게 뛰어놀다 보면 전쟁 같은 거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겠지. 금쪽이도 못난 어른들이 만든 세상을 피해 먼 길을 온 아이들과 놀면서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이 세상에 대해 배우는 계기가 될지 모르겠다. 



그다음 날 금쪽이와 함께 평소에는 잘 가지 않는, 집에서 좀 먼 놀이터에 갔다. 그리고 어제 수업을 같이 들었던 아이와 아이엄마가 보였다.  그 아이는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었다. 소아비만이 심각해 보였고, 수업 시간 내내 대열에서 나와 교실을 아무렇게나 뛰어다녔다. 아이 엄마가 하도 소리를 질러서 아이 이름이 "다빗"이라는 것도 알았다. 내가 먼저 아이 엄마에게 반갑게 말을 걸어보았다.


"어제, 문화센터에서 만났죠? 안녕하세요, 전 금쪽이 엄마예요. 수업 어떠셨어요?"

"문화센터? 아, 예. 좋았어요. 이 수업 처음이세요?"

"네, 처음이에요. 근데 저흰 이 수업이 우크라이나어로 진행되는지도 모르고 갔어요."

"아, 저희도 처음이에요. 맞아요. 수업 우크라이나어예요. 아, 저희는 난민이 아니에요. 독일은 4년 전에 왔거든요."

"혹시 우크라이나에 가족들은 있으신가요?"

"아뇨. 전혀요. 다들 다른 나라로 이민 갔어요. 독일, 미국, 호주 그렇게요. 아 근데 죄송해요. 제가 아직 독일어가 서툴러서요. "

"그래도 걱정 많이 되시겠어요. 저도 요즘 한국 뉴스 듣고 있으면 정말 기분이 안 좋아요. 세상이 어떻게 된 건지. 다들 전쟁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아요. "


그때 "다빗"이는 금쪽이가 가지고 놀던 덤프트럭을 뺐더니 우크라이나어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옆에 다른 아이가 오더니 금쪽이의 다른 장난감을 뺐었다. 엄마들끼리 대화하는 거 보니 얘도 우크라이나 사람인가 보다. 이 녀석들은 장난감을 돌려달라는 금쪽이의 읍소에 전혀 대답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우크라이나어로 놀기 시작했다. 이 엄마들은 이 모습을 보고도 제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아이들이 금쪽이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동안 나는 독일어로 중재를 해보려고 노력했다.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자, 소아비만 "다빗"과 이런 상황을 그냥 지켜보고 있는 다빗이 엄마가 사우스 파크에 나오는 에릭 카트만과 걔네 엄마처럼 보였다.


미안. 비슷한 걸 어떡해.


심술 게이지가 올라왔다. 이 사람들은 난민도 아니고, 4년이나 있었는데도 독일어도 못하고 (더 정확하게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흥!) , 자기 애가 우리 애 장난감을 뺏고 있는 걸 바로 옆에서 보면서 자기들끼리 수다만 떨고 있는 우크라이나 엄마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아, 문센 무용 수업 보내야 돼 말아야 돼? 설마 이 사람들, 일부러 독일말 안 해도 되니까 자기들 편하자고 난민 아이들을 위한 수업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니지 하는 나쁜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부글부글 하고 있는 사이, 금쪽이는 장난감 뺏긴 걸 억울해할 겨를도 없었다. 건너편 모래 상자에서 새로운 친구가 커다란 장난감을 들어 보이며 자기 옆에서 앉아 놀자고 금쪽이에게 손짓을 했기 때문이다. 둘 다 독일어로 대화하면서 깔깔거렸다. 장난감을 뺏거나 말거나. 친구가 사방에 널렸는데 엄마는 뭘 그런 걸 가지고.


오늘도 하나 해결했구나 싶으면 멘붕이 온다. 엄마가 아무리 쫓아다녀도 말을 듣지 않던 아이가 선생님의 손길 한 번에 집중하는 걸 보면서 프로는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출신 에릭 카트만 가족과는 별로 엮기고 싶지가 않다. 30초 거리에 저렴한 가격의 사교육, 그런데 이 수업이 95% 우크라이나어로 진행된다면? 해외 육아 밸런스 게임은 어김없이 난이도 극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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