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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Jun 22. 2023

미니멀 육아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

베를린 부자 동네, 고풍스러운 빌라에 사는 라파엘에게는 알마라는 이름의 딸이 하나 있다. 그리고 아빠 라파엘은 귀여운 아기 알마에게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는다. 옷도 안 사주고, 장난감도 안 사주고, 빵도 안 사준다. 하지만 세 식구가 앉은 식탁에는 음식이 가득하다. 라파엘은 알마에게 유기농 과일로 만든 이유식을 떠 먹인다. 부인 니에베스는 유기농 통밀로 구운 빵을 먹는다. 이 집 창고에는 음식이 가득하고, 아기 알마는 옷도 많고 장난감도 많다. 

이 집 엄마는 스페인사람, 아기는 자연스레 이중언어 당첨 

이 방송이 나왔던 2013년, 라파엘은 소비 파업 (Konsum Streik) 중이었다. 이 집 식구들이 방금 먹은 모든 음식은 유기농 슈퍼마켓 쓰레기통에서 가져왔다. 라파엘 가족이 사는 집은 교회에 속해 있는데, 라파엘은 교회 건물을 관리하는 조건으로 돈 없이도 주거를 해결했다. (이런 꿀 같은 거래를 승인한 교회 관계자는 라파엘의 청빈의 철학이 교회가 추구하는 바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딸의 옷과 장난감은 절대 사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다른 친구들에게 물려받는다. 인터뷰에서 라파엘은 소비 과잉 시대에 필요한 것을 당장 얻을 수는 없더라도 며칠만 기다리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며 웃는다. 출판 작가이기도 한 라파엘은 초대받은 강연에 가기 위해 돈을 쓰지 않는다.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 먼 거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히치하이킹을 한다. 


라파엘의 집은 인터뷰를 하려는 외신 기자들로 바글바글하다


라파엘의 딸은 환경을 아끼는 어른들이 들락날락하는 집에서 컸다. 아빠가 소비를 하는 대신 사람들과의 진짜 연결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슈퍼마켓 쓰레기통에서 쓸만한 것들을 챙기는 것은 법적으로 절도죄에 해당한다. 하지만 라파엘은 슈퍼마켓 매니저들을 직접 만나 설득했다. 방송에 나온 한 고급 유기농 슈퍼마켓 관리자는 라파엘의 철학에 감동해서 라파엘이 올 때마다 하나라도 더 줄려고 안달이었다. 라파엘은 버려지는 식품들로 집에서 파티를 열어 유기농 비건 음식을 사람들에게 대접한다. 만남을 통해 베를린을 넘어 자신과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영향력이 실제로 퍼져 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폐기 위험에 놓인 멀쩡한 빵들을 수거해 난민들을 돕는 모습


지식인 부모를 둔 라파엘은 돈 걱정 없이 컸다고 한다. 그러다 대학 졸업 후 멕시코를 무전 여행한 경험이 라파엘의 인생을 바꾸어 버렸단다. 2023년 현재, 라파엘은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버려지는 식품 및 공산품들을 수거해서 유통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27유로를 내면 제 값을 주고 사긴 부담스러운 유기농 제품들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가 집으로 배달된다. 글을 쓰고 있는 6월 21일, 소비자 만족도가 5점 만점에 무려 4.78이다. 얼마 전 라파엘의 인스타에 올라온 글을 보니 외부 투자도 넉넉히 받은 모양이다. 



1988년생인 세드릭 발트부어거는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투자가, 창업가이다. 젊은 나이의 큰 성공을 거둔 그는 미니멀리스트로도 유명한데, 소유한 물건이 고작 50개에서 70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미니멀리즘이 유행하자 방송국들이 앞다투어 세드릭과 인터뷰를 했다. 세드릭은 옷장이 없고, 모든 옷은 A4용지보다 조금 큰 휴대용 가방에 다 들어간다. 그리고 세탁하는 시간과 옷 고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만 입는다. 부자 세드릭의 아파트를 방문한 리포터는 럭셔리는커녕 식탁 하나만 달랑 있는 거실을 보고 어이가 없어했다. 항상 사업 관련 출장을 가기 때문에 집도 자가가 아니라 임대란다. 자동차는 당연히 없다. 디지털 노매드의 교과서 같은 남자다. 그런데 이런 세드릭이 아빠가 된다고 했다. 


세드릭의 부인은 태어날 아이를 위해 준비한 방을 보여 주었는데 작은 하얀색 아기 침대, 검은색소파, 하얀색서랍장이 전부였다. 7장의 아기옷은 물론 검은색이었다. 쌓여만 가는 육아 용품에 치여 고민했던 나는 코웃음을 쳤다. 미니멀 육아는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다. 댓글을 달아 세드릭에게 아이한테 책은 안 사줄 거냐고 물어봤다. 오디오 북을 들려줄 예정이란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아기 라나가 사는 세드릭의 집이 다시 방송에 나왔다. 여러 번 되감기를 해가며 도대체 이 집에 라나의 장난감이 몇 개나 될까 세어봤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라나를 위해 부자 아빠가 준비한 장난감은 다음과 같다. 우려한 바와는 다르게, 장난감들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1) 원숭이 천 인형

2) 몬테소리 당근 

3) 악기 (기타)

4) 옷에 달수 있는 클립이 있는 쪽쪽이

5) 아기용 주판

6) 빨간 모자 인형


세드릭은 자신의 육아 철학을 설파했는데, 진정한 교육은 낯선 곳에서 깊고 많은 경험을 해보는 것이라고 했다. 라나가 조금 더 크면 여러 나라에서 양육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1년 전 인터뷰를 들어보니 가족 전체가 잠시 태국에서 거주 중이란다. 스위스가 겨울에 너무 춥기도 하고 라나를 위한 교육적 목적도 있다고 했다. 만 1살의 라나는 태국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자기와는 다르게 생긴 총 10개국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소통을 하는 법을 배운다. 어린아이에게 이 경험들이 얼마나 강렬한지 세드릭은 라나는 어린이집에서 데려오자마자 곧장 잠이 들어버린다고 했다. 


라나의 풀네임은 Lana Happy Waldburger이다. 그리고 미니멀리스트 아빠를 둔 라나 해피 (Lana Happy)는 아주 행복하단다. 



미니멀리즘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실천하는 방식이 참 다양하다. 그리고 진짜 미니멀 고수들은 소유보다는 경험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다. 아이한테 뭘 더 사주려고 하지 않고, 부모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몸소 보여준다. 


또한 미니멀 육아의 핵심은 양육 환경이 생각과는 달리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깨닫는 것에 있다. 최소한 한국과 독일, 스위스처럼 잘 사는 나라에 사는 양육자라면 자원은 사실 넘쳐나지, 모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원을 어떻게 쓰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진짜 교육이다. 라파엘은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가져오는 게 역겨운 것이 아니라, 아직도 굶는 사람들이 있는데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것이 역겹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나눔의 삶이 아이가 살아야 할 미래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세드릭은 아이에게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 일찍부터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여러 가지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투자하며 여행과 육아 역시 포기하지 않지만, 옷 깔맞춤이나 비싼 차 같은 것은 과감히 포기한다. 


괜히 육아 인스타그램 보다가 왜 나는 애한테 남들처럼 못해준다 자학할 필요 없다. 세상 어딘가에는 장난감 하나 안 사주면서 쓰레기통에서 꺼낸 음식을 애한테 먹인 아빠와, 그림하나 걸려 있지 않은 집에서 애한테 검은색 옷만 입히는 아빠도 있음을 기억하자. 게다가 세 볼 필요도 없이, 우리 아이들은 독일 아이 알마와 스위스 아이 라나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미 내 안에 좋은 양육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원과 가능성이 있음을, 독일 아빠 라파엘과 스위스 아빠 세드릭은 제대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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