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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Sep 06. 2023

한국, 독일, 베를린 사람 (1)

엄마의 콧바람

나이가 먹어서인지, 사람이 심심해진 건지. 새로운 곳에 가도 가슴이 안 뛴다. 독일 거주 연수가 이제 두 자리를 넘어가니 어딜 가도 그냥 시큰둥하다. 애가 있으니 주말에 여기저기 가긴 하지만, 사실 내가 좋아 가는 게 아니고, 아이가 좋아하는 얼굴을 기대하면서 가는 거다. 내가 진짜 어딜 가서, "보고 싶다"는 경우는 슬프지만 오래전에,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차에 강연을 하러 유럽에 온 절친이 나보고 베를린에 올 수 있냐고 카톡을 보냈다. 남편과 스케줄을 확인했다. 어라? 갈 수 있었다. 남편이 애를 혼자 볼 수 있다고 나보고 가라고 응원해 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까 말까 엄청 고민했다. 첫째, 너무 귀찮았다. 기차표 사고, 호텔 예약하고, 어디 갈지 계획 세우는 거 자체가 그냥 다 시큰둥했다. 이미 베를린은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또 가서 뭘 더 보지 싶었다. 하지만 점점 드문드문 해지는 내 카톡 안 읽은 메시지 숫자가 생각났다. 오랜 친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아무래도 후회할 것 같았다. 


감당 안 되는 권태와 귀찮음을 여름밤의 맥주 한잔으로 이겨냈다. 우선 교통편부터 확인했다. 내가 사랑하는 도이칠란트 티켓으로 베를린에 가려니 9시간이 걸렸다. 고속열차는 5시간이 걸렸다. 시간 대 별로 40유로부터 110유로까지 가격이 다양했다. 갑자기 그냥 다 귀찮아지면서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돌아오는 표만 고속열차를 사고 갈 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도이칠란트 티켓으로 가기로 했다.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돌았다. 가위를 들고 욕실에 들어가 머리를 짧은 단발로 잘랐다. 뭐 망치면 미용실 가지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자고 있는 아들과 남편의 볼에 뽀뽀를 하고 기차를 탔다. 총 네 번을 갈아타야 했는데, 중간중간에 남는 시간이 30분에서 1시간 정도 있었다. 전혀 준비한 것 없이 가는 여행이라 기차가 정차하기 전에 구글 검색을 했다. 그러다 내가 꼭 보고 싶었던 생태주의 건축가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의 건물, 초록 성채 (Gruene Zitadelle)가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중앙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란다. 


이런 보물이 있나 (구글맵 캡처)

마그데부르크에서 기차가 멈추자마자 지도를 보고 종종걸음으로 초록 성채로 향했다. 초록 성채는 그런데 사실 분홍색이었으며, 직선을 혐오했던 훈데르트바서 답게 둥글둥글 삐딱 삐딱하다. 이 놀라운 건물은 그냥 보통 사람이 사는 주거 공간이라는데, 안에 공연장도 있고 카페도 있다. 아쉽게도 커피 마실 시간은 없으니 건물을 뱅뱅 돌면서 감탄만 한다. 정말 상투적인 단어가 찰떡일 땐 어떻게 해야 할까. "환상적"이라는 말 외에는 이 건물을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보물이 이런 생각지도 못한 곳에 숨겨져 있다니.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가는 길, 내가 직접 자른 단발머리가 시원한 여름 바람에 찰랑 거렸다. 이게 나였고 지금도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 여름은 길다. 도착해서 짐을 풀었더니 4시였다. 친구한테 배고프다고 찡찡거린 후 우선 요즘 베를린에서 가장 핫하다는 사천식 매콤한 단단면을 먹으러 갔다. 한국도 마라탕이 유행이라는데 베를린 사람들도 매운 게 당기나 보다. 여름에만 한다는 차가운 단단면을 시켰다. 너무 맛있어서 면 추가 안 한 것을 후회했다. 

Berlin Liu Nodelhaus 구글 맵 캡처


입가심을 하려 거리를 돌아다니, 자전거를 타고 순찰하던 베를린 경찰 4명이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가게로 들어가서 산딸기 아이스크림을 넣은 프로세코를 시켰다. 와인에 아이스크림을 넣어먹는 건 처음이었다. 여름의 맛이다. 종이컵에 가득 든 프로세코를 다 마셨더니 9시간 기차 타고 온 여독은 알딸딸 사라져 버렸다.  


해가 지자 우리는 구글검색 맨 처음 나온 루프탑 바를 찾아갔다. 순전히 사진에 나온 커다란 고양이 조형물이 귀여워서 결정했다. 베를린 핫플이라는 것 만 알았지, 여기가 원래 쇼핑몰 주차장이라 제대로 된 입구가 없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헤매다 포기하려 하는데 어디 선가 음악 소리가 들렸다. 주차장 문을 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문신이 가득한 젊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조카들이 어떻게 노나 구경 나온 이모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냥 모른 척하고 직진했다. 남들처럼 손목에 입장 도장을 받고, 주차장길을 올라가니 딴 세상이 나왔다.


한국 이모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베를린 핫플은 심지어 노키즈 존이 아닌 예스 키즈존이었다.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을 위해 커다란 모래 놀이터와 장난감이 루프탑 바 한가운데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올라온 사람들, 흰머리가 멋진 손님들, 커다란 BTS 사진첩을 놓고 토론하던 배꼽티를 입은 10대들, 그리고 한국 출신 유부녀 둘도, 자리가 없어 모두 같은 테이블에 끼여 앉았다.


그리고 해가 늦게 지는 한 여름의 베를린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klunkerkranich.org




"나 여기 너무 좋아."

"나중에 남편도 델고와."

"그래야겠지? 나 우리 애한테도 여기 보여 주고 싶어."

"우리 여기서 매년 만날까?"


뭔가 공기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내 혈육도 여기에 와서 이 공기를 느껴봐야 할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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