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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Sep 12. 2023

한국, 독일, 베를린 사람 (2)

아들 둘과 엄마 둘의 베를린 여행

남동생이 독일로 출장을 온다고 했다. 출장지는 내가 사는 동네와 멀지 않은 곳이었고 심지어 휴가도 며칠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친정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금지옥엽 손자를 보고 싶어서 가슴앓이 중이셨고, 겸사겸사 남동생과 엄마가 같이 독일에 왔다! 


한국에서 힘들게 온 가족들과 함께 주말에 짧게나마 어디를 가자는 얘기가 나왔고, 나는 무조건 베를린을 외쳤다. 걸음이 편하지 않은 엄마, 유치원생 4살짜리 꼬맹이와 함께라는 것이 걸렸지만, "지금 아니면 우리가 언제 같이 여행을 할 수 있겠냐"는 기적의 논리로 그냥 밀어붙였다. 남편은 주말 근무가 생겨서 이번 여행에서 빠지기로 했다. 


하지만 이 야심 찬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질뻔했다. 엄마가 오전에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셔서 여행이고 뭐고, 아예 항공권을 바꾸어 한국으로 돌아가시려 했다. 아무래도 무리였나 싶어서 나 역시 여행은 포기하고 그냥 일찍 잠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는 불굴의 의지로 새벽 5시에 일어나셨다. 레고로 베를린 스카이 라인을 예습하던 손자의 모습이 아무래도 걸리셨던 모양이다. 자녀 셋을 외국에 보냈던 우리 엄마와 외국 생활 20년 차 딸. 모녀는 10분 만에 후다닥 여행 가방을 꾸려 아침 기차를 탔다. 




레고 베를린 시리즈 (https://www.lego.com/de-de/product/berlin-21027)




우리 집 꼬맹이도, 다리 아픈 친정엄마도 5시간 기차 여행을 어떻게 잘 버텨냈다. 거의 1년 만에 재회했던 할머니와 외삼촌과의 여행에 아들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호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엄마. 이제 집에 가자. 아빠가 보고 싶어."

"아들아. 우리는 오늘 베를린에 여행을 온 거야. 우리는 월요일에 집에 돌아갈 거야."

"싫어. 난 지금 집에 갈 거야. 여기 우리 집 아니잖아."


베를린에 짐을 풀자마자 울먹울먹 거리는 아드님. 아이고. 이걸 어쩌냐. 우선 식구들 밥부터 먹이자 싶었다. 전날 컨디션 난조를 보였던 엄마를 위해 한식을 먹기로 했다. 트램에 앉아 15분 떨어진 거리에 있는 한식당이 위치한 정거장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기 트램이 구글이 가르쳐 준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운행하기 시작했다. 오늘 베를린 시내에서 시위가 있단다. 교통 통제로 인해 오늘 하루 대중교통 운행에 많은 변경사항이 있을 거라고.


이미 아이는 트램에서 10분도 안 돼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흐릴 거라는 예보가 무색하게 짱짱한 여름 날씨에 잠들어 버린 애를 어깨에 들쳐 매고 한식당을 검색했다. 다행히 도보 3분 거리에 식당 하나가 보였다. 엄마는 돌솥 비빔밥을 한 숟갈 뜨더니 말했다.


"나 독일에서 식당 차릴까? 어떻게 이렇게 맛이 없을 수가 있니?"


한국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던 한식당은 독일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아이는 내 무릎에 누워 잠을 잤다.


설상가상으로 하루종일 GPS를 켜놓은 내 핸드폰 배터리는 간당간당했고, 길잡이 역할을 맡은 남동생은 잦은 돌발 상황에 짜증이 가득했다. 구글이 안내해 준 정거장에는 시위로 인해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버스 말고 전철을 타고 그냥 호텔로 돌아가자 말했다.


전철에 앉은 식구들은 예상 못한 더위에 진이 빠져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아들이 유리창에 코를 박고 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엄마! 저것 봐! 티브이 타워야!"


레고로 한 예습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들이 베를린의 랜드마크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중앙역에 도착하기 30초 전, 내가 외쳤다. 


"우리, 여기서 내리지 말자. 이거 타고 계속 가보자!"


베를린 동물원 역에 내리자 노란색 2층버스가 보였다. 2층버스라면 환장하는 아드님은 흥분해서 저거를 타야 한다 소리쳤다. 우선 타고 봤다. 대중교통 마니아인 아들은 오늘 하루에만 노란색 트램, 전철, 지하철, 이층 버스를 다 탔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버스 안에서 휴대폰 충전도 했다. 중간에 내려 체크 포인트 찰리에서 사진도 찍고, 오후 커피도 즐겼다. 


베를린 힙지로 노이 쾰른에 가서 수로를 따라 걸으며 동네 구경도 하고 아들은 놀이터에 가서 미끄럼틀도 탔다. 역시 한국사람은 우리 밖에 없는 한식당에서 또다시 매우 실망스러운 식사를 하긴 했지만 말이다. 밤에 도로에서 시위 뒤풀이 파티가 열린다는 말을 듣자마자 동생이 재빨리 택시를 불러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다리 아픈 친정 엄마와 유치원 다니는 아드님, 한국 돌아 가자 마자 또 출장을 가야 하는 남동생은 베를린 장벽도 보고, 벼룩시장도 갔다. 관광객답게 엄마와 남동생, 나와 아들. 3대에 걸친 모자들이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엄마가 힘들어 보일 때는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에너지 재정비를 했다. 그리고는 몇 주 전에 예약했던 독일 국회 의사당에 갔다. 4살짜리가 의젓하게 아동용 오디오 가이드를 목에 걸고 베를린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돔으로 올라갔다. 아이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베를린 하늘을 즐겼다. 


국회 의사당 돔 (출처 https://images.app.goo.gl/8RcXBj8wLKk2YDea9)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는 베트남 식당으로 정했다. 베를린에는 동독 시절 건너온 베트남 사람들이 하는 식당들이 엄청 많다. 엄마는 독일 한식당에 충분히 실망하셨는지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리고 베트남 식당에서 주문을 받으신 분은 공교롭게도 한인 교포였다. 유쾌한 박박 머리 청년이 독일 억양이 섞인 한국말로 메뉴를 추천해 주었다. 엄마는 음식을 먹어보고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엄지 척을 날렸다. 네온으로 장식한 베트남 식당에서는 테크노 음악이 흘렀다. 동생이 말했다. 


"쌀국수랑 테크노의 조합이라니. 진짜 베를린스럽다."


여기에요 (출처 : https://www.instagram.com/pho.noodlebar/)



한국으로 떠나는 동생을 뒤로하고 엄마와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베를린이 아주 좋았단다! 대중교통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놀랐고 대도시인데도 큰 공원이 많은게 참 맘에 들었다고. 첫째 날의 좌충우돌에도 불구하고 만보는 우습게 걸었던 대도시 여행을 끝까지 버텨준 엄마와 아이, 휴가까지 내서 누나를 보러 와준 동생이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아이는 아빠에게 달려가 다음에는 아빠도 베를린에 꼭 가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왜냐면 우리는 한국, 독일, 베를린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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