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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Jun 13. 2023

놀이에 진심인 독일 사람들

놀아서 강하다!

학회 참석을 위해 코펜하겐에 갔다. 하루 종일 논문 발표를 듣자니,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되었다. 학회 둘째 날에는 모두가 같이 모여 그 유명한 크리스티아나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특이한 동네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다들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저녁 식사 후에 한 잔 더 하러 가자고 얘기가 나왔다. 내 발표는 마지막 날이었고, 처음 발표하는 내용이라 불안했다. 뒤풀이고 뭐고 그냥 빨리 잠이나 자기로 했다. 


화장도 제대로 못 지우고 쓰러져 아침에 일어나 보니 8시 50분이었다. 패닉 모드로 가방을 싸고, 옷을 갈아입었다. 베를린에서 왔다는 키 큰 여학생이 준비한 9시 30분 첫 발표는 아무래도 못 갈 것 같았다. 


예상외로 내 발표에 반응이 좋아 흡족하게 학회장을 나오는데 베를린 친구가 나를 불렀다. 쨍쨍한 파란 하늘 아래, 그녀의 수영 선수 같은 넓은 어깨가 드러나 보이는 하얀 나시티가 정말 눈이 부셨다. 나는 그녀에게 인사를 한 후 늦잠을 자서 발표에 못 갔다고 사과를 했다. 


"괜찮아. 나도 하마터면 제시간에 도착 못할 뻔했어. 오늘 아침 5시까지 놀았거든."

"뭐라고? 너 발표 오늘 첫 번째 아니었어?"

"응. 여기서 만난 독일 애들이랑 지금 3일째 클럽에 갔어. 아침에 친구랑 걸어서 7시에 돌아왔어."


베를린 아가씨는 그러고서는 8시간도 넘게 잔 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쌩쌩한 얼굴로 다른 발표자들과 수다를 떨러 갔다. 


3일 동안을 밤을 새워 놀고도 학회 마지막 날 첫 발표가 가능한 사람들. 독일인의 체력은 정말 남 다른 거 같다. 여기서 만난 한국 학생들은 독일 학생들이 점심에 바나나 하나만 먹고 하루 종일 축구하는 거 보면 좌절감이 든다고 했다. 도대체 이 무시무시한 연비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그 비밀이 바로 독일 놀이 문화라고 생각한다.




독일 놀이터는 꽤 위험하다. 아이들이 직접 작동하게 만든 분수 바로 옆에는 뾰쪽한 각을 그대로 살린 대리석 벤치가 있다. 모서리가 없는 플라스틱 재질의 한국 놀이터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 금쪽이를 포함한 여러 명의 아이들이 여기를 뛰어다니면서 논다. 매우 미끄럽고, 애가 거기 서 있는 거 보면 불안 불안하다. 물펌프를 설치해 아이들이 댐도 만들고 물총 놀이도 하는 공간은 바위로 만들어졌다. 기저귀 찬 아이들도 노는 이 공간은 안전장치가 하나도 없다. 그래도 아주 어린아이들이 아닌 이상 부모들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놀이터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미끄럼틀을 올라가려면 밧줄을 타고 가거나 암벽 등반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것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미끄럼틀은 바로 금쪽이 유치원 바로 옆에 있다. 외다리 나무를 밧줄하나만 잡고 올라가 4미터는 족히 되는 높이에서 그야말로 수직 낙하해서 내려온다. 유치원이 끝나면 친구들은, 여기서 다시 만나, 중력의 힘을 체험한다. 


이런 독일 놀이터들을 본 한 미국 유투버는 "놀이터가 아니라 군대 유격장 같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맨날 이렇게 놀면서 크니 독일 사람들이 터프하단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독일 놀이터는 위험을 접해봐야 위험을 대비, 통제할 수 있다는 철학과 통계에 기초하고 있다. 안전에 관해서 깐깐하기로 유명한 독일사람들은 규정 안에서 가장 위험할 수 있는 놀이 기구를 일부러 개발한다. 영국 가디언지 보도에 따르면 이건 독일 보험사가 요구한 사항이라고도 한다. 아이들의 실내활동시간이 늘고 있으므로 야외에서 위험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이다. 



놀이에 진심인 독일 문화를 잘 보여주는 또 하나는 바로 "Die Matschhose" 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진흙바지정도 되겠다. 명품 아동복을 입고 자라는 한국 아이들과는 달리 독일 아이들은 진흙바지를 입고 자란다. 한국에 있을 때 동네에 딱 하나 있는 모래 놀이터에 가려고 쿠팡에서 비슷한 것을 찾았더니 "모내기 바지"와 "갯벌 체험용 바지"가 나왔다. 독일은 이 "모내기 갯벌 바지"가 유치원 필수 준비물이다. 이게 있어야 비가 오는 날에 밖에 나가 모래 놀이를 할 수 있고, 진흙탕에 들어가 뛰어놀 수 있고, 축축하게 젖은 미끄럼틀을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부모도 아이도 유치원 선생님도 모두 윈윈윈이다. 어차피 더러워질게 뻔해서인지 아이의 진흙바지는 선생님이 집에 가져가라고 할 때까지 세탁도 하지 않고 않고 흙투성이로 유치원 옷걸이에 걸려있다. 


진흙바지뿐만 아니라 방수재킷 역시 보통 세트로 사기도 하는데, 유행 타는 아이템이 아니라 물려받거나, 중고로 구입한다. 그것도 아니면 독일 슈퍼마켓에서 특별 판매할 때 저렴하게 사 입히면 된다. 물론 진흙바지 패션은 예쁘진 않다. 작년 한국에 있을 때 독일 방수재킷을 아이에게 입혔더니 태권도 사범님이 어디서 할아버지 옷 같은 걸 입고 왔냐고 해서 무안한 적도 있었다.




오늘도 아이는 유격장을 닮았다는 독일 놀이터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즐겁게 잘 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만큼 부모로서 행복한 순간이 있을까 싶다. 내가 아이에게 명품 아동복을 사줄 재력은 없어도 돈으로는 못 사는 아이의 명품 체력을 기르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키즈카페에 갈 경제력이 없어 아이들이 지루하게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누구나 갈 수 있고 전혀 시시하지 않은 공공 놀이터들이 대도시 안 숲 속에 빼곡히 자리 잡았다. 아이 옷 더러워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이 모두 자발적 모내기 패션을 추구한다. 비 오는 날에도 아이가 밖에서 노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매일매일 독일 아이들은 하얗게 불태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친구들이랑 마음껏 소리 지르며 뛰고 구르고 오르고 내린다. 그렇게 놀면서 자란 아이들은 일을 해야 하는 어른이 돼서도 피곤한 내색이 없다. 이렇게 놀이에 진심인 독일 문화, 솔직히 많이 부럽다. 생산성 높은 사회의 진짜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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