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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May 23. 2023

외국어 울렁증

구독자 200명 돌파를 기념하며

애는 무슨 죄 (출처 : Bored Panda)


우리가 올해 여름, 한국에 못 들어가게 되자, 친정 엄마가 아이가 좋아하는 자동차 장난감과 아기자기한 한국 아동복 등등을 정말 잔뜩 보내주셨다. 엄마는 손주가 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최저가 항공권을 검색하시는 분이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무려 18시간이 넘는 여행을 어떻게 하려고. 이 소포에 들어 있는 물건 하나하나를 고르느라 엄마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을지 안 봐도 뻔하다. 그러기에 난 할머니의 선물인 이 잠바가 여러모로 너무 슬프다. 할머니의 손주 사랑에 어디 감히 알파벳 따위 하나가 쓸데없이 끼어드냔 말이다. 



이 잠바의 존재는 나에겐 한국의 역사이고, 비극이기도 하다. 넘지 못할 벽 같은 것이다. 그리고 잠바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금방 파악하셨다면, 더욱더 저의 읍소를 들어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NICE HOLLIDAY가 아니라 NICE HOLIDAY가 맞습니다.




내가 가입한 맘카페에서  어린아이들이 직접 참여하는 행사를 연다고 광고를 했다. 경단녀 엄마들이 모여, 대기업등에서 지원금까지 따내며 세련된 홍보물도 만들었다. 그리고 포스터 상단에 "FLEE MARKET"이라고 떡하니 적혀 있는 상태로 장장 3주간을 게시했다. 보다 못한 내가 운영자에게 벼룩(FLEA)이 어디 도망갔냐고 슬쩍 얘기했다. 물론 정말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 포스터에 알파벳 하나 잘못 들어간 것 때문에 욕을 먹는 건 부당하다. 하지만 동네 행사가 벼룩시장이 아니라 FLEA MARKET이어야만 했던 이유를 난 잘 모르겠다.


누군가 그랬다. 한국인은 세계 최고의 발명품을 싫어하는 민족이라고. 한글은 단 한 줄도 없는 외국어 메뉴판이 유행이라 노인들은 커피 한잔도 시키지 못하는 지경이라는데. 한국 정치인 입에서 국립추모공원이 아니라 "내셔날 메모리얼 파크"가 더 멋지게 들린다는 말이 나왔다는데. 내가 여기서 한국 사는 친정엄마랑 독일 사는 내 아들이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도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국말로 놀아주는 게 무슨 소용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한국 책 구하기가 어려워서 독일 동화책을 일일이 번역해 하루도 빠짐없이 읽어주는 수고를 도대체 왜 하는 걸까. 


세계 최저 출생률과 더불어 언급되는 영어유치원의 의미를 곱씹을수록 이 모든 상황이 참 비극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어디에서는 아이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러워질 때까지 밖에 나가서 놀 동안, 어디에서는 만 3살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영유 "레테" 준비용 과외를 한다고 했다. 



물론 "아이러니"를 잘 알고 있다. 어쩔 땐 조사만 빼고 다 외국어를 쓰면서 얘기할 때도 있다. 언어란, 계속 움직이며 섞이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냥 실수였을 수도 있다. 한국 품질 인증 마크가 달려있는 아동복, 하나 더 잘못 들어간 알파벳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뭐가 그리 문제일까. 


다만 한글이 적혀 있는 한국 아동복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이 잘 나갈수록 한국이 서양을 따라 하려 한다고 코웃음 치던, 인종차별적 요소가 다분한 서양 언론 댓글들을 잔뜩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기 많은 한국 드라마에서 재벌들은 왜 다들 유럽 골동품이 잔뜩 있는 방에서 프랑스 산 와인을 기울이고 있을까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 싸함은 어디서 온 걸까를 고민하면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이 지나 노골적이던 식민주의의 폭력이 잠잠해 지자, 이제 알아서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지워나가는 건가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가해자의 겉모습을 따라 하면서 자기혐오를 키우는 피해자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의 이 허접한 글들을 읽어주신 고마운 분들께, 애교와 진심과 절망을 섞어 부탁드린다. 제발 건설회사가 센트럴 로열 팰리스 포레 리버빌 같은 아파트 작명을 하면 "이 회사 왜 이리 촌스럽냐고" 동네방네 떠들어주시라고. "여기 외국 같다"라고 칭찬하는 사람에게 "어머, 요즘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네" 하고 무안을 주시라고. 그래서 할머니가 한국에서 정성스럽게 보내 준 선물을 손자가 당당히 밖에 입고 나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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