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 정말 사무치게 싫다
평창 올림픽이 한창이었던 그 해 겨울, 투병 중이시던 아빠를 보러 한국에 들어갔다. 부모님은 은퇴하시고 서울과 가까운 신도시 대기업 브랜드가 붙은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처음 가보는 한국 아파트 스케일에 입이 딱 벌어졌다. 지하주차장을 지나니 슈퍼마켓이 나오고, 헬스클럽, 수영장, 카페가 있었다. 거실 탁자에는 전화번호부만큼이나 두꺼운 아파트 매뉴얼이 있었다. 스마트홈이 이런 거구나, 유럽에서 온 촌사람은 감탄했다.
아빠는 오랜만에 집에 온 딸과 보내는 시간이 좋으셨던 거 같다. 아빠와 함께 제주도 삼촌이 보내준 귤을 산더미처럼 까먹으며, 소리 꽥꽥 지르면서 올림픽 응원을 하며,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는 미소가 진다. 아빠는 좀 야위긴 했지만 충청도 식 유머 신공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나는 충만한 기분으로 침대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였다. 엄마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XX야, 119! 빨리 119 불러!"
거실에 나가보니 아빠가 쓰러져 있었다. 엄마는 꼭 아빠를 부를 때 내 이름을 같이 붙여 부르곤 했다.
"XX 아빠! 정신 좀 차려! XX야! 빨리 119 전화해!"
아까 전만 해도 멀쩡했던 아빠의 낯선 모습에 충격을 받은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전화기에 대고 뭐라고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곧 나는 통화 중 얼마 되지 않아 심각한 난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거기 주소가 어떻게 되시죠?"
"여기 주소는, XX시 XX 아파트 XXX동 XXXX호입니다."
"거기에 센트럴 XX 아파트가 있고 리버 XX아파트가 있어요. 정확히 어디세요?"
"..."
내가 그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베란다를 넘어 거실에 비추던 옆 동 외벽에 달린 파란색 대기업 아파트 로고 불빛이었다. 자기 집 주소도 제대로 모르는 멍청이 바보가 돼버린 나는 그 자리에서 몇 초간 굳어버렸고, 그런 나를 본 엄마가 재빨리 전화를 낚아채서 정확한 주소를 불러주었다. 얼마 안 있어 119가 집에 도착했고, 나는 아빠의 손을 꼭 잡고 같이 구급차에 올라탔다. 한 밤 중 한강은 여전히 예뻤다. 구급차 귀퉁이에 앉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나에게는 너무나 낯선 집 주소를 주문을 외우듯 계속 중얼거렸다.
XX 강변 리버 포레 X X 아파트.
XX 강변 리버 포레 X X 아파트.
XX 강변 리버 포레 X X 아파트.
무려 13개나 되는 글자수.
도대체 포레는 뭘까. 리버는 영어 같은데, 포레도 영어인가? 독어로 포레면, Porree, 대파?
그리고 왜 강변이란 말이 있는데 이름에 리버가 같이 들어갈까.
아빠의 입원 수속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새벽 2시가 다 되었다. 엄마는 내가 할 일은 더 없으니 빨리 집에 가라고 했다. 집에 가는 차 안에서도 나는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불렀다.
XX 강변 리버 포레 X X 아파트.
XX 강변 리버 포레 X X 아파트.
XX 강변 리버 포레 X X 아파트.
포레가 진짜 뭘까. 그래 한 번 뭔지 인터넷에서 찾아보자.
몇 번의 구글링을 통해 알아냈다. 아. forêt. 불어구나. 숲이구나. 어 근데 여기 주위에 숲 없는데? 여기 숲은커녕 공사하는 크레인 천지인데? 여기가 숲이라고? 아파트 숲?
다음날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신도시 아파트의 이름들은 내가 한국에서 자랐던 90년대와는 많이 달랐다. 정말 이름이 길었고, 외국어가 많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어떤 아파트 단지의 이름은 브라운 스톤이었다. 브라운 스톤 얘기를 꺼낸 사람이 거기는 임대 주택이라면서 거기 사는 사람이 어떻고 험담을 했다.
브라운 스톤이라면 미국 뉴욕에 있다는 그 비싼 브라운 스톤? 근데 왜 여기 브라운 스톤 아파트는 브라운이 아니고 벽돌도 없고 하얀색이랑 파란색인데? 이 아파트 단지를 기획한 사람 누군지 몰라도 정말 사악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사는 초등 동창과 얘기하며 얼마나 내가 어려운 아파트 이름 때문에 당황했는지를 털어놓았다. 동창이 말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소포를 보낼 일이 생겼어. 우체국 직원이 주소를 불러 달라는 거야. 그래서 말해줬지.
로얄 팰리스 아파트.
주소를 듣더니 직원이 놀래서 나를 빤히 쳐다 보더라고. 로얄 팰리스? 아니, 이 사람 왕족인가? 근데 왕족이 왜 아파트에 살아? 진짜 쪽팔려 줄을 뻔했다. "
물론 건설사 누구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다. 당신들의 센스 없는 작명 솜씨 때문에 우리 아빠가 일찍 돌아가실 뻔했다고 말이다. 제발. 아파트 이름 좀 제대로, 다섯 글자 이내로, 외국어 섞지 않고 알아듣게 지어 줬으면 좋겠다. XX 강변 리버 포레 X X 아파트. 정말, 사무치게 싫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