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유치원생은 학습지는 안 해도 카드는 좀 해야 살아남습니다.
심란했다.
금요일에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가 카드게임 규칙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으니 집에서 연습해 오라고 숙제를 내줬다.
선생님이 주신 것은 메모리 게임이었다. 카드는 총 32벌인데 카드를 뒤집어 놓았다가 순서가 되면 그림을 확인하고 똑같은 그림이 있는 카드 한 쌍을 찾아내면 된다. 비슷한 게 집에 있어서 내가 보여준 적도 있는데 아이가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니 나야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에서 아이를 붙잡고 해 봤더니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기 게임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조금 해보더니 카드를 마구 섞더니 하기 싫다고 등을 돌려 버렸다.
주말에는 비가 와서 시내 어린이 도서관에 아이를 데려갔는데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부모들로 바글바글했다. 사실 여기에 와서 부모들이랑 카드놀이 하는 애들을 보면 자기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독일 어린이 도서관은 책도 많지만 보드 게임도 정말 많다. 예전에 우리끼리 보드 게임을 하고 있으니 다른 아이들도 몰려와서 같이 재미있게 놀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카드놀이 연습을 한다거나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한쪽에서 열심히 블록을 쌓더니 술래잡기를 하자고 떼를 썼다. 보다 못해 도서관 한편에 있는 아이들용 보드게임을 하려 가보니 2~3세용 선반이 완전히 비어있었다. 어쩔 수 없이 5세용 게임을 열어보니 내가 규칙이 이해가 안 돼서 선반에 다시 집어넣었다.
도서관에 오자마자 신발부터 벗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우리 아들을 잡으러 다니다 보니 저기 앉아있는 우리 만큼이나 도서관에서 자주 보는 일본 가족들이 보였다. 아드님은 처음 만난 4살 형아들이랑 바퀴 달린 소파를 타고 도서관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보다 작은 아이는 자기 아빠 옆에서 책에 대해 독어로 대화 중이었다. 슬쩍 곁눈질을 해보니 책에 글밥도 많았다. 옆 테이블에는 엄마와 5살 정도 돼 보이는 딸이 체스를 두고 있었다. 도미노를 하는 가족들, 우노를 하는 가족들로 테이블이 꽉 찼다.
작년에 한국에 체류했을 때 만 3살도 안된 아이가 학습지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혀를 끌끌 찼다. 내가 몰라도 한참 몰랐다. 독일 어린이 도서관에서 느낀 건 여긴 학습지를 안 할 뿐이지, 교육에 관심이 있는 것은 똑같다는 점이었다. 여기, 정말 사람 많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고모, 베이비 시터, 다 출동한다. 온 나라 말이 다 들린다. 여기는 독일부모도 오고 중국부모도 오고 터키부모도 오고 우리 가족도 온다.
어느새 아이가 배고프다고 나를 부를 때였다. 꽃이 달린 커다란 머리장식에 전통의상인듯한 화려한 옷을 입은 멋진 여자분이 나타났다. 그분을 중심으로 아이들이 모였다. 전쟁을 피해 멀리 독일까지 온 아이들은 열심히 그림책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우크라이나어란다. 뭔지 모르게 짠하다. 도서관은 정말 좋은 거다. 누구한테나 열려 있으며 비록 몸이 떠나 있어도 정신을 나의 고향과 연결해 줄 수도 있는 곳이다. 아이들, 책 읽는 어른 모두 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지금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 아이는 저기 사람들이 모여서 뭐 하나 흘깃흘깃하더니 자기가 모르는 말이 들리니 다시 새로 사귄 형들이랑 도서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여기는 아이들이 뛰어다녀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아이는 여기가 책장이 많아서 술래잡기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재밌었다고 다음 주에도 도서관에 또 가자고 한다. 결국 카드는 전혀 연습하지 못한 채로 등원시켜야 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