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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Oct 23. 2023

4살 아이랑 배낭여행하기

둘이서 진짜 배낭만 하나 들고 다녀왔어요

"이번엔 오면 안 될 거 같아."


선배 언니가 말했다. 언니 말이 맞다. 이 번에 브뤼셀로 놀러 가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아니 며칠 전에 브뤼셀에서 테러가 나서 사람이 죽었는데 어딜 이 위험한 곳에 애를 데리고 가느냐 말이다. 게다가 언니는 계속 몸살이고, 주말에는 비가 온단다. 아무리 극 J형 언니랑 한 달 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지만 다 취소다. 기차표가 아깝긴 하지만, 이 번엔 진짜 아니다.


일찍 안 일어나도 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렸다. 애를 재우고 나도 옆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꿈속에서 나는 아침 7시 40분 브뤼셀행 기차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계속 놓치기 시작했다. 내가 아침 7시에 커피 전문가 과정에 등록해서 커피를 내리다가 기차를 놓치는 버전, 고등학생들 숙제를 봐주다 기차를 놓치는 버전 등 황당한 개꿈이 반복되었다. 꿈속에서 엉엉 울다 번쩍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아직 기회가 있다! 마침 화장실에 앉아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왠지 브뤼셀 가야 될 거 같아."


후다닥 집히는 데로 속옷 두벌이랑 티셔츠 하나, 잠옷 바지 하나씩을 바닥에 던져놨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같이 깬 아이를 달래던 남편이 빨리 잠을 자라고 했다. 남편은 이번 주말 내내 근무라 여행을 같이 갈 수가 없다. 알람만 맞춰놓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아 근데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야겠다. 어, 그럼 어디서 자야 되지? 애라 모르겠다. 내일 못 일어나거나, 비가 오거나, 애가 칭얼거리면 안 가면 되지 뭐. 


아침에 일어났다. 딱 10분 안에 짐 꾸려 애 옷 입혀 나가야 한다. 책가방만 한 노란색 배낭에 바닥에 쌓여 있던 옷 가지랑 세면도구, 아이 장난감 두 개만 챙겨서 집을 나섰다. 아침 6시 45분이다. 아직은 많이 어둡다. 비는 다행히 안 온다. 브뤼셀까지 가는 고속열차를 타려면 쾰른까지 가는 기차를 타서 중앙역에서 한 번 더 갈아타야 한다. 아뿔싸, 애 마실 물조차 없다.


7시 5분, 기차가 온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이층 기차다. 오늘 잘 호텔방도 예약하지 않은 엄마와 함께 여행을 가는 우리 집 어린이. 너무 신났다. 노래까지 불러 가며 쾰른 역에 도착했고, 무사히 열차에 탔다. 벨기에 국경에 다다를 무렵부터 밖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주말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가 무색하게 밖에는 멋진 일출이 보였다. 푸른 언덕 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젖소를 본 아이는 탄성을 질렀다. 



배낭여행을 자주 했던 엄마도 4살짜리 아이가 옆에 있으니 약간 부담이 되었다. 브뤼셀 가는 기차 안에서 검색했더니 역 앞에 있는 4성 호텔이 인터넷 특가 세일을 해서 122유로란다. 관광지랑은 좀 떨어져 있어 예약할까 말까 하다가 흐지부지 브뤼셀 기차역에 도착해 버렸다. 아침 9시 45분이다. 불어, 더치 다 모르는 까막눈이라 한 10분 정도 출구를 찾아 헤매다가 밖으로 나오니 호텔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설상가상 내 휴대폰이 먹통이다. 애라 모르겠다 밀레니엄 감성으로 휴대폰 안 보고 아이 손을 꼭 잡고 내 감만 믿고 걸어갔다. 어? 여기 기찻길이 잘 보이네, 이 쪽에다 숙소를 잡으면 애가 좋아하겠는데? 중앙역에서 도보 2분, 이름 들어본 호텔 체인, 방에서 기차 잘 보임. 로비에 장난감 많음. 130유로. 처음 들어간 호텔에 체크인 완료!


비 오기 전에 관광을 후다닥 끝내 버려야 할 거 같았다. 휴대폰은 배낭에 넣고 안내 데스크를 찾아갔다.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백발의 직원은 무지 친절하다! 구매 시간부터 새벽 1시까지 쓸 수 있는 무제한 대중교통권이 하루에 8유로다. 당연히 만 4세는 무료다. 직원이 어디서 왔냐 해서 한국에서 왔다니까 인사말 가르쳐 달라길래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를 연습했다. 참 이런 거 오랜만에 해본다. 직원은 이미 한국 관광객이랑 많이 만났는지 금방 잘 따라 한다. 사람 엄청 많은 지하철에서 하얀 플리스를 입고 기차에서 만난 독일 가족이 준 초콜릿을 몰래 먹은 위험한 우리 아이. 입과 손에 잔뜩 초콜릿이 묻어 있다. 내가 난감해하자 갑자기 옆에 서 있던 예쁜 누나가 휴지를 건넨다. 

기상청 야유회에 비 오는 날씨에 간 미니유럽

첫 관광지는 미니유럽이다. 역시 아이는 공짜고 엄마는 19유로를 냈다. 브뤼셀의 상징 같은 아토미움에 갈 수도 있지만, 그건 인플루엔서들이 사진 찍으러 가는 곳이고 우리에게는 장난감 기차랑 자동차가 가득한 미니유럽이 딱이다. 햇빛이 쨍쨍 난다. 미니 유럽은 유럽의 명소들을 미니어처로 만든 테마파크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인데도 동선 배치를 잘해 놨고, 구성도 알차서 지루하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면 이태리 베스비오 화산에서 연기도 나고, 레버를 돌리면 네덜란드 킨데르데이크의 풍차가 돌아간다. 이런 건 학교 갈 나이만 돼도 시시하겠지만 4살 아들에게는 정말 찰떡이다.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났는데 와플로 유인해도 애가 나갈 생각을 안 한다. 게다가 유럽의 유명한 기차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으니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드디어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길래 아이를 설득해 나왔다. 며칠 전 테러가 났다는데. 토요일 브뤼셀은 북적북적하다. 설 자리도 없는 지하철에 타니 사람들이 이틀 내내 몇 번이고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아이와 같이 간 브뤼셀의 첫인상, 진짜 합격이다.


그다음에는 오줌싸개 동상이다. 역 이름 아래 마네킹 피스라고 적혀있길래 거기로 내렸다. 내 휴대폰 로밍은 아직도 먹통이다. 오줌싸개 동상은 대학시절 첫 배낭여행 때 대강 보고 지나갔을 뿐, 기억이 가물 가물 했다. 하지만 구글 맵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멀리서도 그 앞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테러 공격, 비 오는 날씨에도, 직접 보면 실망하기로 유명한 마네킹 피스는 인기 만점이었다. 최근에 야외에서 서서 소변을 봐야 할 때 큰 어려움을 겪었던 아드님에게 마네킹 피스를 잘 관찰해서 다음에는 흘리지 말자고 약속을 받아냈다. (독일 남자아이들은 앉아서 소변을 본다.)


유명한 그랑 플라스 주위는 사진 찍으면 예쁜 건물과 음식들이 엄청 많다. 하지만 비가 조금씩 떨어지는 날씨에 애를 데리고 핫플을 갈 수는 없는 법이다. 검색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줄 안 서도 되고 사람이 적당히 있는 곳에 들어가 아이에게 와플을 먹였다. 우리가 주문을 끝내자마자 밖에서 손님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비가 더 오기 시작했다. 딸기 와플이랑 캐러멜 와플을 들고 (음료 포함 총 13유로) 공교롭게 독일인 노부부 옆에 앉았다. 부부는 아이에게 계속 말을 걸었고 아이도 신나서 변신 로봇 장난감을 자랑했다. 


밖으로 나오니 우산을 써야 할 날씨다. 아이는 기념품 가게를 보더니 비를 뚫고 뛰어가 직접 기념품을 골랐다. 이렇게 해서 이런 건 누가 사나 싶었던 조악한 기념품은 4살 고객이 사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두워지고 있어 호텔에 다시 왔더니 벌써 5시 반이다. 티브이를 켜 봤더니 프랑스, 독일, 영국 공영방송이 같이 나왔다. 뉴스만 나오는 재미없는 채널이 아니라 드라마랑 퀴즈쇼도 나온다. 외국어 천재 벨기에 사람들의 비결이 이건가? 불어 잘하는 독일 친구도 어렸을 때 티브이에서 나오던 불어 만화 영화가 그 비결이라고 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 했는데 티브이에서 불어로 만화 영화가 나오는 걸 보고 아이가 신기해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재밌었냐니까 "아주 멋지고 재미있었어"란다.

아드님이 직접 구매하신 기념품



비 오는 저녁, 따뜻한 쌀국수가 생각났다. 지하철에서 막 나오자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구호가 들리고 경찰차들이 보였다. 울먹 거리는 목소리, 화가 난 목소리, 시위대를 바라보는 행인들의 침묵. 길고 커다란 팔레스타인 깃발을 든 시위대들은 그렇게 규모가 크지 않았고, 아무리 많아야 200명 남짓으로 보였다. 하지만 안 그래도 독일에서 친팔레스타인 시위가 과격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참이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베트남 음식점이 모여 있는 골목으로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살짝 사진 찍었는데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엄마, 여기 너무 시끄러워."


그렇게 들어간 작은 쌀국숫집은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로 가득했다. 쌀국숫집 문이 닫히자, 시위대의 구호는 들리지 않았다. 


아주. 전혀. 


테러도. 전쟁도.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도.


그냥 다 문 밖의 일이 되어 버렸다.


쌀국숫집 문은 고장이 났는지 손님들이 들고나갈 때마다 다시 열렸고, 베트남인 식당 주인은 몇 번이고 분주하게 문을 닫았다.




일요일 밤, 우리는 독일 집에 다시 돌아왔다.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평소처럼 유치원 친구들이랑 베를린에서 로봇으로 도둑 잡는 이야기를 할까 했더니, 엄마랑 브뤼셀 갔던 이야기를 해달란다. 아이를 꼭 껴안고 따뜻한 이불 안에 들어가 "엄마랑 XX 이는 브뤼셀에 갔어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둘 다 곧 잠이 쏟아져서 이야기는 제1장, 둘이서 브뤼셀 역에 내리는 씬에서 끝나버렸다. 고작 이틀이었지만 엄마와 네 살 아이의 첫 배낭여행은 어느새 우리 만의 이야기가 되었다. 꿈속에 들어간 듯 여러 번 반추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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