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난한 소년의 이야기
2012년 9월의 어느 날, 예레미아스(Jeremias Thiel)는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의 부모님은 독일 기초 수급자, 이른바 하르쪄 (Hartzer)였다. 집 냉장고는 늘 비어 있었고 소년은 신발을 사기 위해 축구장에서 빈 병을 모아야 했다. 부모는 모두 정신병을 앓고 있어 일을 하지 못했고, 쌍둥이 동생은 주의력 결핍 장애로 항상 학교에서 문제가 많았다. 아버지는 조울증에 시달리며 집에서 나가 자식들과 떨어져 혼자 살았다. 어머니는 도박벽이 있었고, 가끔씩 어디 나간다는 말도 없이 아이들을 집에 가두어 두고 몇 시간씩 사라지곤 했다. 소년이 결심을 하게 된 날도 마찬 가지였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있는 방의 문을 잠가 버린 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평범했던 어느 날, 소년은 언제나처럼 식구들을 깨우고, 아침 식사를 만들고, 자잘한 집안일들을 했다. 그리고는 쌍둥이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와 청소년 복지과 사무실문을 두드렸다. 소년은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 정도로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저 집에서 나가고 싶어요. 부모님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요."
소년은 11살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일은 한 권의 책이 되기에 충분했다.
복지과 직원은 즉시 조치를 취했다. ADHD가 심했던 쌍둥이 동생은 행동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머무르는 시설에, 소년은 아동 보호시설에 들어갔다. 소년은 혼자 쓸 수 있는 방과, 열쇠를 받고 생전 처음으로 삶에서 안전함과 안정감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는 11살 소년은 생전 처음으로 꿈을 가져도 되겠다고 느꼈다.
소년은 성적이 좋지는 않았지만 항상 호기심이 많았다. 하지만 소년의 가정환경을 잘 알고 있던 선생님들은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 입학 추천을 해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종합학교 (Gesamtschule)에 들어가게 된 소년은 사람들의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6살이 되자 소년은 2017년 독일 남부도시 프라이부르크에 위치한 국제 고등학교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한다.
소년은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세계 90여 개 국가에서 온 청소년들과 함께 영어로 수업을 받는 기회를 얻는다. 독일 소도시, 아동보호시설에서 자란 소년은 이제 더 큰 세상에 나와서 다양한 관점과 경험을 접하게 되었다. 소년은 잠도 못 자고 영어만 쓰며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수험생 생활을 혼자서 해낸다. 영양에도 신경을 쓰면서 비건식을 고집하고 미국유학을 위해 국제 수능을 준비했다.
고등학교 시절, 소년의 부모님은 멀리 사는 아들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소년이 집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실업자 상태로 정부 보조금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가족과의 연락을 끊지 않았다. 소년의 부모님은 지난 과거를 미안해하면서도 아들이 토크쇼에 나와 가족의 치부를 공개했던 것을 못 마땅해했다. 특히 어머니는 방송이 나간 후 아들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들과 잘 지내고 싶다고 하면서도 소년이 다니는 학교의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
하지만 소년은 부모를 이해한다고 하며, 양육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부모들을 품는다. 부모에게 어떤 감정이 드느냐는 질문에 소년은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의 단단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소년은 14살에 독일 사민당 (SPD)에 입당한 후, 저소득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대변했다.
2020년, 미국 대학생이 된 예레미아스는 책을 출판한다. "도시락이 없으면 어린 시절도 없고 기회도 없다 (Kein Pausenbrot, Keine Kindheit, Keine Chance)"는 책에서 예레미아스는 학교에서 친구들이 싸 온 도시락을 보면서 빈곤이 무엇인지, 기회의 불공정함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소년의 어린 시절, 도시락은 싸구려 햄을 얹은 기름기 가득한 토스트 빵 두 조각이었다. 제대로 된 통에 있는 것도 아니고 비닐로 대충 싸서 보낸 샌드위치는 교과서 사이에 뭉개져서 먹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간식시간은 한 아이의 사회적 위치가 노골적으로 보이는 경험이었단다.
현재 독일 아동의 20%가량은 빈곤층에 속하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동 빈곤은 커다란 사회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을 도울 것인가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고, 이런 정치적 무능력의 최대 피해자는 당연히 아이들이다.
어른들이 한 일이라고는 문제 해결을 위해 누가 돈을 더 많이 내느냐 가지고 싸우는 것 뿐이었다. 몇 세대를 이미 지나 아이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와버렸다. 그리고 그 어른들은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며 불공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예레미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는 훈훈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는 것을 강조했다. 도시락 같이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해야 우리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그의 지혜에 감탄한다. 똑똑한 2001년생 독일 청년의 이야기에서 작게나마 희망을 본다.
(출처 : Vom Hartz IV-Kind zum Elite-Studenten | WDR Do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