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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Nov 23. 2023

미래의 내가 나를 본다면

진땀 나는 밤에

넷플릭스 독일 드라마 다크를 드디어 정주행 했다. 워낙 내용이 복잡하기로 유명해서 시도도 안 하고 있었는데, 노잼으로 유명하던 독일애들, 요즘 갑자기 열일한다는 감탄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깨달은 점이 있어 잠자기 전에 적어두려 한다.


그것은 내 생애 정말 중요한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 의해서 결정 났다는 것이다. 드라마 다크에서 처럼,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마주친다면 뭐라고 얘기할까? 자꾸 게으름 피우지 말고 일이나 더 하라고 할까, 아니면 멋 부린답시고 얇은 코트 입고 비 오는 날 밖에 나가라고 할까?



그 해 봄, 나는 영국의 한 도시에 살고 있었다. 논문 때문에 임시로 내려온 도시였는데, 고맙게도 친구가 자기 집 남는 방을 내주었다. 친구는 독립 중고 서점을 운영했는데, 지역 신문에도 여러 번 날 정도로 정성을 많이 들인 공간이었다. 오래된 3층 건물은 시 정부의 특별 지원을 받아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임대해 쓰고 있었다. 1층에는 하얀색 고양이가 낮잠을 자는 큰 통창이 있어 손님들이 고양이에 홀려 들어오곤 했다. 2층부터는 생활공간으로 쓰고 있었는데, 서점답게 3층까지 책들이 가득했다. 


서점에 거주하는 고양이 크림이는 팬들이 많아서 영화과 학생들이 홍보 비디오까지 만들어줬다.

그러다 친구는 나에게 서점을 부탁하고 웨일스에 사는 사촌 결혼식에 가게 되었다. 며칠간 내가 카운터에 앉아 책을 팔다가 아무래도 논문이 더 급하지 싶어서 오랜만에 학교로 가기로 했다. 뭘 입을까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길가에서 칭찬을 들었던 얇은 울코트를 입었다. 


4월인데 날씨가 많이 추웠다. 서점에서 길 만 건너면 나오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비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어서 짜증이 났다. 버스는 15분에 하나씩 오는데. 이러다 30분 넘게 기다릴라. 젖은 코트를 입고 달달달 떨고 있자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다시 길을 건너 서점으로 들어갔다. 코트 말고 더 두꺼운 옷이 필요할 것 같았다. 2층으로 올라가는데 아무 생각 없이 부엌으로 들어가다 심장이 멎을 뻔했다.


가스스토브에 내가 올려놓은 주전자가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나에게 하얀색 고양이가 야옹 거리며 다가왔다.


책방의 현재와 과거. 책방 홈페이지에서 캡쳐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만약 버스가 제시간에 왔더라면, 그래서 내가 하루 종일 학교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닥다닥 붙은, 문화재급은 안 되더라도 정부가 보조금까지 주면서 관리하던 건물들이 가득한 거리, 그리고 3층까지 빼곡한 책들이 나 때문에 불쏘시개가 되었더라면. 그날 괜히 멋 부리지 않고 두꺼운 옷을 입고 나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잊을만하면 다시 곱씹게 된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딘가에서 버스를 막고 있었나. 미래의 내가 영국 아줌마로 변신해서 "어머, 이 코트 이쁘다"라고 그 전날 나에게 괜히 뽐뿌를 넣어주었나. 내가 바보같이 올려둔 주전자를 못 봤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친구는? 고양이 크리미는?


그래서 오늘도 되새긴다. 하찮은 순간은 하나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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