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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Nov 23. 2023

독일에서 덕질한 얘기

엄마의 사심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은 부자도 아니고, 절세 미남미녀도 아니고, 노벨상 수상자도 아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도 몇 개를 구했지, 진짜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게 감탄하게 하는 분. 남편 앞에서도 내가 대놓고 흠모해 마지않는 분은 바로바로 이분이시다.

20년이 넘도록 한결같은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독일의 전설적인 어린이 프로그램 "쥐 나오는 방송 (Sendung mit der Maus)"의 진행자를 맡고 있는 랄프 카스퍼스 (Ralph Caspers 1972-)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1999년부터 지금까지 한눈 안 팔고 "쥐 나오는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쥐 나오는 방송"은 워낙 독일에서 유명해서 따로 글을 하나 파야 할 정도 중요하다. 파급력을 굳이 따진다면 전국노래자랑과 유퀴즈, 그리고 뽀로로를 합쳤다고 보면 된다. 독일에서 자랐다면 일요일 아침에 부모님도 같이 보는, 누구나 사랑하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건축, 예술, 물리, 천문, 사회 이슈 등등 안 다루는 분야가 없다.

오렌지 색 쥐는 독일 일요일 아침을 담당하는 국민 캐릭터이다 (출처 WDR Kinder)


이 프로그램을 만든 아민 마이발트는 1971년부터 프로그램 진행자 및 기획/제작을 하고 있다. 독일의 송해 선생님이다. 내 생각엔 공무원보다 쥐 나오는 방송 진행자가 되는 게 더 안정적인 직업일 거 같아, 가끔씩 쥐 나오는 방송이 나오면 아이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곤 한다. 아들아. 이거 같다. 그러니 랄프는 쥐 나오는 방송의 세대교체를 담당하며 평생직장을 잡으신 행운남이다. 

독일 연방대통령한테 훈장 받는 쥐 (출처 :WDR)


랄프는 다양한 테마를 다루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오래 진행해서 인지, 질문을 받으면 대답이 항상 기가 막히다. 지금 당장 "하늘은 왜 파래요?"라는 질문에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로 조리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 분은 이 걸 즉석에서 해낸다. 아니, 아이들이 아니라 공대생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도 대화를 주도하며 사람들이 경청하게 만든다.  너무 멋있다!! 그리고 50이 넘었지만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에 보면서 심쿵한다. 요즘은 과학 관련 유튜브에도 나와서 내 밥친구 노릇을 톡톡히 한다.


그리고 이런 랄프가 우리 동네 도서관에 온단다. 자기가 직접 쓴 동화책을 읽어주러 말이다. 



토요일 오후, 도서관에 가는 길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앗, 친 팔레스타인 시위대다. 엄청난 규모다. 경찰들이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치자 아이가 시끄럽다고 얼굴을 찌푸렸다. 비도 오고 바람도 차다. 배고프고 목마르단다. 


"엄마! 왜 가야 돼?"

"오늘 쥐 나오는 방송에 나오는 랄프가 우리 도서관에 온대. 책을 읽어준대!"

"엄마, 싫어. 나 그냥 놀 거야."


아들아. 엄마가 최애를 처음 영접하게 생겼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빨리 올라가 좋은 자리를 잡아야지 했는데, 이미 사람들이 가득하다. 어찌어찌하여 5번째 줄에 아이와 앉아 오랫동안 사모해 왔던 티브이 속 최애 밥친구를 기다렸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도 랄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간식도 맛이 없다면서 빨리 집에 가서 놀자고 졸랐다. 도서관 직원들은 안절부절못하며 교통정체로 랄프가 아직도 도착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도 지루했는지 관객석을 뱅글뱅글 돌면서 잡기 놀이를 시작했다. 아들도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아이들과 열심히 뛰어다녔다.


다른 부모들과 더불어 함께 넋이 나가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는데 드디어, 내 다음 생애에는 꼭 만나리라 기도했던 랄프 님이 옆에서 뿅 하고 나타나셨다. 


진짜 티브이에서 본 거랑 똑같이 생겼다. 2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는 저 9대 1 가르마, 검은색 뿔테 안경, 카키 바지. 호리호리한 큰 키. 너무너무 평범하고 선한 인상이다. 아, 저 변함없는 안정감이여. 



그래서 어땠냐고? 머리도 좋은데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인성까지 보유한 사기캐 랄프,  1시간 정도 직접 쓴 동화책을 읽었다. 앞 줄에 앉은 초등학생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첫 번째 동화책이 끝나자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배고파. 엄마 재미없어. 엄마 우리 아래 가서 놀면 안 돼?

점프하는 모습인데 워낙 안정감이 있는 분이라 그냥 서있는 거 같음.


1시간 내내 조용히 하라고 아이를 달래다 보니 유체 이탈을 경험했다. 나의 영혼은 도서관을 날아다니며 누가 다림질했는지 진짜 주름 하나 없는 랄프의 카키 바지를 바라보았다.  아, 이 것은 엄마 자아와 덕후 자아의 싸움이군. 앞에 앉은 초등 팬들은 이미 랄프가 쓴 동화책 내용을 다 알고 있나 보다. 랄프가 읽기도 전에 애들이 소리를 치며 마구 줄거리를 스포해 버렸다. 



책도 엄청 많이 쓰신 분 


도서관이 끝날 시간이 되어 오늘의 행사는 마무리해야 한다며 사서들이 들어왔다. 랄프는 능숙한 솜씨로 관객들 줄을 세웠다. 남편이 물었다. "사인 안 받을 거야?"


"안 받아."


내 반응에 남편은 어리둥절해했다.


랄프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첫 줄 초등학생들이 오늘 읽었던 동화책들을 손에 들고 조잘거렸다. "쥐 나오는 방송"을 보고 자랐을 엄마 아빠들도 사인받을 랄프의 책들을 들고 있었다. 최애의 인기를 확인한 나는 입이 튀어나왔다. 심술 난 표정으로 도서관을 나와 사인도 안 받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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