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는 우리 집 아이의 정체성
우리 집 서열 1위는 비록 4년 좀 넘게 이 세상에서 활동 중이시지만 어른인 나보다 훨씬 잘하는 게 있다. 친구 사귀기 스킬은 최소 우리 집 주위 10미터 안에서 1퍼센트 안에 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이가 한국에서 유치원에 등원한 첫날, 너무 궁금했다. 생전 처음으로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꼬맹이들이 바글바글한 낯선 공간에 들어갔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말이다.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낯을 가린 아이는 우리 집 아이가 아니었다. 아이의 첫 알림장에는 "XX가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몇몇 아이들이 처음 보는 친구의 등장에 수줍어했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아드님은 유치원과 동네에서 금방 친구가 생겼고, 아들을 좋아한다는 여자 아이들이 등장해 그 부모님들이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워낙 잘 지내서 내심 걱정했는데, 아이는 독일에 돌아와서도 금방 적응을 했다. 한 달도 안 돼서 절친 이 생겼다. 그 둘이 하도 유난스럽게 친해서 유치원에서 유명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만 4살이 되자 상급반에 들어갔고, 선생님들의 배려로 둘은 같은 반에 배정되었다.
그러다 토마스가 나타났다.
토마스는 지난 9월에 유치원에 들어온 5살 뉴비이다. 토마스는 우리 아이를 첫날부터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토마스가 자꾸 아무 때나 껴안으려 해서 선생님이 주의를 주었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유치원에서 토마스가 준 생일 초대 카드를 가지고 왔다.
"엄마! POLACKE 가 생일이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참고로 POLACKE는 폴란드 인을 비하하는 독일말로 한국식으로 따진다면, 조센징, 짱개, 쪽발이, 깜둥이 정도 되겠다. 이렇게 써놓고도 민망하다. 한마디로 밖에서도 안에서도 절대 쓰면 안 되는 말이다.
"아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엄마! 톰이 POLACKE야. 친구들이 POLACKE가 나를 좋아한대."
유치원 신발장에는 이름만 쓰여 있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토마스 가족은 폴란드계였다. 하지만 부모님 모두 독일에서 태어난 2세 이민자들이었다.
이런 말은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걸까. 이 천진난만한 아이들 중 누군가가 그런 말을 썼다는 거 아닌가? 그 아이들 뒤에는 부모가 있을 것이고, 애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 누군가는 우리 아이를 도대체 뭐라고 부를까.
외국인 부모를 둔 친구들에게 우리 아이가 나중에 이상한 말을 들을까 걱정이 된다고 했다. 차별을 당하지는 않을지, 가슴 아픈 일을 겪지는 않을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친구들이 그랬다.
"걱정할 거 없어. 100% 확률로 네가 말한 거 다 겪게 될 거야. 다 일어날 일이야."
독일식 의사소통은 너무나도 담백하여 어쩔 땐 위로가 되기도 하고, 어쩔 땐 정말 황당하기도 하다.
심란한 마음으로 아이랑 같이 어린이 도서관에 갔더니 오랫동안 못 봤던 한국 가족이 앉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안부를 물어보니 이사 예정이란다. 왜냐고 물어보니 이 동네가 동성애자가 너무 많아서 아이들 교육에 안 좋단다.
" 저기요, 동성애자가 많이 산다는 건 그나마 여기가 차별이 적은 동네란 뜻이에요. 동성애자 많이 안 사는 곳에 이사 가시면 아마 동네에서 유일한 한국 가족일 거예요."
물론 그런 말은 안 했고, 그냥 듣기만 했다. 우리는 한국말은 통해도 말은 안 통하는구나.
아들은 어디 갔나 둘러보니 그러면 그렇지. 저기서 새로 사귄 친구랑 놀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둘이 깔깔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는 아들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흑인아이로, 둘이서 높이 탑을 쌓고 부수어 가며 한참을 놀았다. 방금 만난 사이가 맞나 싶게 화기애애했다. 멀리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친구가 물었다.
"넌 어디서 왔어?"
"난, 독일. 넌 어디서 왔어?"
"나도, 독일."
수줍음이라고는 1도 없는 독일 사는 흑인 아이와 황인 아이의 이 대화는 백인들이 다수인 도서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오오오. 너네 둘 너무 멋진데?
그리하여 이 도시에 계속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