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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Jan 18. 2024

독일 사는 우리는 자연인이다

얼떨결 디지털 다이어트

새해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 사는 독일동네에 비가 많이 왔다. 어느 정도였냐면 도로가 침수되어 한동안 버스들이 노선을 바꿔야 했다. 그리고 1월 2일, 우리 집 인터넷이 멈췄다.


당연히 다 해봤다. 모뎀도 꺼보고, 고객센터에 방문도 해봤다. 1월 2일을 기점으로 갑자기 인터넷이 안된다는 고객들이 많아졌다나. 전화상담도 했다. 독일 살면서 일이 하루 만에 해결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뭐 그래도 이런 상황이 1주일이 넘어가니 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전화를 준다는 놈은 전화가 없고, 방문한다는 기사는 오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고 한 시간 정도 통화를 했다. 힙합 비트 대기시간음악을 들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이 똑같은 얘기를 묻고 또 물었다. 코드 뽑으라기에 뽑고, 누르라는 버튼을 다 눌렀다. 그래도 모뎀의 인터넷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결론은 자기네 들도 모르겠단다. 새 모뎀을 보내주는 수밖에 없겠단다. 내가 그럼 직접 모뎀을 픽업하겠다고 했다. 절차상 안된단다. 모뎀이 5일 안에 도착할 거란다. 새로운 가족의 정의가 "패스워드를 이미 공유해서 인터넷을 자동으로 연결할 수 있는 사이"라고 어디서 주워들은 거 같은데, 모뎀이 망가지면 우리 가족들은 어쩌란 말이냐.


당연히 모뎀은 5일 만에 오지 않았다. 2주가 지났다. 그 사이 독일 기차는 파업을 선언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자연인


나는 (거의) 자연인이다. 난 잠깐 한국 살 때 정말 필수라서 샀던 휴대폰이 있긴 한데, 독일 휴대전화 번호가 없다. 뭐 여긴 인증하고 그런 게 별로 없어서 그런지 별 필요를 못 느낀다. 우리 집 꼬마는 내 전화기를 "엄마 사진기"라고 부른다.


아, 내 남편은 더 심하다. 아예 휴대폰이 없다. 요즘은 스님들도 삼성이랑 아이폰 다 들고 다닌다는데, 뭐 우린 이렇게 산다.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냐고? 우리는 약속 시간을 칼 같이 지킨다. 아주 드물지만, 늦을 거 같으면 집전화나, 심지어는 이메일로 연락을 꼭 한다. 휴대폰 많이 하는 친구들 보면 약속을 파투 내는 경우를 너무 자주 봤다. 계속 연락 시간에 대해 연락 주고받다 보면 거기에 기가 다 빨려서 약속에 못 나오는 건가. 실시간으로 연락이 가능해서 그런지, 말만 무성하고 직접 만나질 못하더라.


친구들도 처음엔 궁시렁궁시렁하다가 그냥 받아들인다. 쟤네들은 원래 저런 인간들이고, 최소한 한 번 약속하면 무조건 나오고, 그리고 이 인간들은 약속을 하면 파투 낼 방법이 없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 엄빠가 휴대폰을 안 쓰니, 아이도 휴대폰을 전혀 안 쓴다 (아직까지는). 저 답답한 딸년 때문에 욕을 참고 있는, 친정 엄마도 그거 하나는 칭찬했다. 아이가 식당에서 휴대폰 안 줘도 조용히 밥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이 희한한 일이 돼버렸으니.


그런 자연인도, 넷플릭스도 보고 인강도 듣고 브런치에 글도 쓰고 할 건 다 한다. 심지어는 예전에는 IT 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게 언제 적 디지털리지어룽입니까.



독일 인터넷이 얼마나 후지냐면, 코로나 시절 화상 인터뷰를 하는데 화질, 음질이 너무 구려서 티브이 진행자가 인터뷰하다 말고 독일 인터넷을 막 욕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메르켈 시절부터 디지털리지어룽 (digitalisierung)을 외쳤지만, 신용카드도 아니고 현금카드도 안 받는 가게가 아직도 수두룩한데, 바랄 걸 바라겠다. 



이렇게 실력 없는 고객 서비스와 욕 나오는 인터넷 환경,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해진 고객의 태평함이 만나 환장의 3중 콜라보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나와 우리 식구는 엉겁결에 디지털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다이어트 두 번째 날, 와이파이를 쓰러 도서관에 갔다가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대여할 수 있는 걸 기억해 냈다 (요즘은 도서관에서 진짜 별 걸 다 빌려 준다. 심지어는 운동기구도!). 구비된 영화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 영화도 많고, 꼭 보고 싶었던 최신 영화까지 다 준비되어 있었다. 남산의 부장들, 패스트 라이브스, 택시 운전사, 에스트로이드 시티를 빌렸다. 


디비디도 디지털이지만 약간 물성이 좀 더 남아 있다고 해야 하나? 디비디가 플레이어에 들어갈 때 소리, 디비디가 뱅글뱅글 도는 소리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웠다. 영화 보면서 괜히 이 것 저 것 검색을 하질 않으니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듣고 싶은 팟캐스트와 읽고 싶었던 한국책을 다운로드했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뭘 읽고 쓰긴 해야 했다. 검색창 하나 없이 메모장 열어 놓고 읽은 책과 팟캐스트 내용을 정리했다. 글이 술술까지는 아니지만, 살살살 나왔다. 연재는 업로드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데 집에 와이파이가 없으니 우선 써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날카로운 댓글들이 난무하는 뉴스들을 2주가 넘게 전혀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보기가 싫었다. 예전에는 집에서 틈만 나면 뉴스 기사들을 읽었는데, 와이파이가 제한된 자원이 되자, 전혀 관심이 없어졌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웹사이트의 첫 알파벳에 무심코 손이 가면 몸서리를 치며 창을 닫아버렸다. 싫어. 안 볼 거야.


그러면서 깨달았다. 이게 되네. 집에 인터넷 필요 없겠다. 신랑아, 우리 그냥, 인터넷 해지 해볼까?



5일이면 온다는 모뎀은 소식이 없고, 어쨌건 지금 이 모뎀은 버려야겠지 싶어 코드를 뽑았다. 그때 모뎀 뒤에 숨어 있던 아주 작은 리셋 버튼이 보였다. 너무 작아서 펜 끝으로 눌러야 하는 그런 버튼 말이다. 고객센터의 그 많은 안내원들이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이 리셋 버튼, 갑자기 "혹시?"라는 생각에 다시 모뎀을 연결해 리셋 버튼을 눌렀다. 


인터넷 불이 들어왔다.


허탈함, 민망함, 황당함, 그리고 약간의 실망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15일간의 얼떨결 디지털 다이어트가 끝이 났다. 인터넷이 되긴 하는데 그게 그렇게 기쁘지가 않았다. 뉴스 창은 여전히 열지 않았고, 좋아하는 밴드 신곡 나왔길래 그 거 하나 들었다. 대청소를 해서 2주 넘게 집이 반짝반짝 윤이 나는데, 현관 앞에 진흙탕에서 뛰어놀다 온 스컹크 한 마리가 들어온 기분이었다. 






(사진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VNDbrYJ7Ngk 

https://www.zeit.de/digital/internet/2021-09/digitalpolitik-netzpolitische-bilanz-bundesregierung-kanzlerschaft-angela-merk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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