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악어엄마 Dec 27. 2023

올해도 당연히 티브이 봐야지

독일 사람들의 명절, 티브이와 함께하세요

드디어 크리스마스가 끝났다. 산더미 같아 보였던 크리스마스 쿠키는 일치감치 다 먹어 치웠고, 그 커다랗던 크리스마스 로스트 역시 하루가 지나자 완벽히 해체되어 우리 가족 몸속에서 열심히 소화 중이다. 남편은 크리스마스 전통을 무지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남편을 알게 된 이후 지난 19년 동안 딱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남편은 똑같은 요리를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돼지고기 로스트, 적양상추 요리, 크뇌델 (밀가루, 빵, 허브로 만든 커다란 경단을 끓는 물에 조리한다)이다. 샐러드나 다른 거 하나 더 추가하자 해도 안된단다. 점심 먹고 요리를 시작해서 7시쯤 먹는다. 먹고 나면 진짜 배에 돌이 들어간 듯 묵직하다. 이 것이 바로 고기의 힘! 하는 듯한 맛이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한 19년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은 또 하나의 크리스마스 전통이 있다.


점심 먹고 무조건 티브이를 켜서 이 영화를 봐야 한다. 바로바로 세 개의 개암열매와 신데렐라 (Drei Haselnüsse für Aschenbrödel)!


넷플릭스에서 정주행 하는 게 자연스러운 아들을 키우는 엑스세대 남편, 올해는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여기저기 티브이 채널을 돌리며 갸웃갸웃한다. 아니 이 거 무조건 지역 공영방송 채널 하나에서는 나와야 하는데, 오늘은 우리가 놓쳤나? 이 영화는 절대 놓치기가 쉽지 않다. 12월만 되면 나오고 또 나오고 재방송이 또 나온다. 올해는 언제 언제 나왔나 편성표를 찾아보니 24일 날 3번, 25일 날 3번 26일에도 한 번 나왔다. 물론 12월 31일에도 2번 나오고 혹시 깜빡하신 분들을 위해 1월 6일에도 또 나온다. 이 정도면 멱살을 잡고 "이래도 안 볼 거냐"는 독일인들의 친절한 협박이 되겠다. 


이래도 안 보시렵니까? 이 영화 오늘 무조건 나온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전통이 중요하여 티브이 리모컨을 이리저리 눌러대던 우리 집 아저씨도, 세월과 기술과 자본의 공세에 무릎을 꿇고, 넷플릭스를 열었다. 역시 2023년 12월 26일, 독일 넷플릭스 인기 영화 6위에 빛나는 세 개의 개암열매와 신데렐라! 분명 티브이에서 나왔을텐데 우리 같은 가족들이 넷플릭스로 봤나 보다. 우리도 보기 싫다는 애를 억지로 앉혀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 아들아, 어쩌겠냐. 넌 독일 한국 사람이잖냐.  


독일인들, 정말 집요한 데가 있는 민족이다. 아 진짜 신데렐라가 뭐라고. 독일애들아. 크리스마스 영화 많잖아. 다이하드도 있고, 나 홀로 집에,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등. 하지만, 독일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크리스마스 영화는 세 개의 개암열매와 신데렐라 (Drei Haselnüsse für Aschenbrödel)! 날씨가 추워지면 독일 티브이 어딘가에서는 영화 전문가들의 인터뷰가 나온다. 원래는 여름에 찍으려고 했는데 여건이 안 돼서 겨울에 촬영했고, 그 결과 영화의 눈 내리는 배경이 크리스마스랑 찰떡이었다나.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영화는 진짜로 특별한 구석이 있긴 하다. 첫 번째, 이 영화는 체코 영화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3년에 나온 공산주의 국가에서 만든 영화가 서독에서 대 히트를 쳤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솔직히 아주 아주 놀랍고 부럽다. 유럽 내 공산주의 국가들은 북한과 같이 고립을 선택하지 않았다. 또한 서독 아이들은 동독에서 만든 만화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개성공단이 처음 건설 되었을 때 뉴스에 나온 지도를 보고 엄청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니, 개성이 이렇게 서울이랑 가깝다고? 


또한 이 영화 속 신데렐라는 매우 자주적이다. 왕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역할이 아니다. 왕자와 맞먹거나,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지닌 (사냥 등등) 재주꾼이다. 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도, 권위에 절대 쫄지 않는다. 숲 한가운데에서 무기를 든 귀족 출신 남자 셋을 만나도, 그들을 골탕 먹일 수 있는 배짱도 있다. 이 역시 영화가 독일에서 무려 50년이 되도록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가부장 제도가 남아 있던, 냉전의 한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정치적, 이념적, 사회적 갈등을 뛰어넘어보려고 했던 시도가 있었던 거 보면, 50년 전 사람들도, 다들 치열하게, 용감하게 살았구나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도 외친다. 어쩔티비? 당연하지! 


후기 : 우리가 영화, 세 개의 개암열매와 신데렐라를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왔었다. 간호사인 친구는 크리스마스이지만 근무 중이었다. (돈 더 준다고 한다)  뒤에서 들려오는 영화 음악소리를 듣고 눈물이 찔끔났다나. 이럴 때 보면 독일 사람들도 귀여운 구석이 있다.


(표지 사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3707-Moritzburg-2016-Aschenbr%C3%B6del_WPK-Br%C3%BCck_%26_Sohn_Kunstverlag.jpg)

작가의 이전글 올해의 마지막 여행지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