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부터 이어지는 야트막한 야산이 끝나는 지점의 삼태기 같이 생긴 지형에 가옥 몇 채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8월 중순,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막바지 무더위가 마을을 뒤덮고 있고, 촌로(村老)들은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마을 한가운데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 삼삼오오 모여든다.
한여름의 긴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더니 지평선 위에 걸렸다. 붉은 석양은 내일도 역시 날씨가 무더울 거라는 일기예보라도 하는 듯하다. 산봉우리가 태양을 거의 다 삼킬 무렵, 느티나무 밑의 노인들은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자기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나른한 몸을 이끌고 앞마당에 걸린 솥에 불을 지피고 저녁밥을 짓기 시작한다. 아궁이 속에서 보릿대나 낙엽이 타면서 내뿜는 고소한 연기가 온 마을을 뒤덮는다. 언덕 위의 미루나무 위에서는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면서 늦은 여름을 알리고 있다.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언덕 위의 경사진 수수밭에는 허수아비가 유령처럼 서 있다. 가끔 일렁이는 바람결에 그들의 소맷자락에 매달린 깡통에서 공허한 울림만 전해질뿐, 아무리 화려한 옷과 멋진 모자로 장식하여도 그들은 걸을 수도, 소리칠 수도 없다. 마치 영혼이 박제된 사슴처럼.
공동묘지 입구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가 나무귀신처럼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며 늘어서 있다. 그 너머, 어둠으로 둘러싸인 공동묘지에는 밤안개가 무덤 주인의 혼백인 양 주위를 돌아다닌다. 묘지 주변의 벌레들도 무서워 숨을 죽이고 날 밝기만 기다리고 있다.
곧이어 어둠의 장막이 마을을 뒤덮기 시작하더니, 마을 군데군데 덩그렇게 서 있는 가로등이 불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잠시 후, 가로등 아래에서는 사방에서 몰려든 나방과 날파리들이 빙빙 돌아가며 군무를 펼친다. 그 무리 속에는 늘어지게 오수(午睡)를 즐기는 통에 밤잠이 달아난 매미들도 끼여 있다. 일부 날짐승은 불그스름한 등불 아래에서 멋모르고 날뛰다가 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에 걸려 졸지에 이 세상과 하직을 하기도 한다.
더운 여름 저녁에 불빛마저도 붉은색일 게 뭐람, 차라리 하얀 수은등이면 한밤중 으스스한 기분에 심적으로나마 덜 더울 텐데.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이 만물이 이치라고 했던가. 지금은 열기를 더하는 짜증스러운 붉은 가로등불이지만, 한겨울밤 삭풍이 불 때를 생각해서 참아 두기로 한다.
마을을 둘러싼 대나무 숲 속에서는 자다가 깬 새들로 푸드덕거린다. 아마도 약한 바람에 일렁거리는 대나무 가지 위에서 중심을 잃었나 보다. 무더위 속에서 겨우 잠들었을 터인데, 선잠에서 깨어나 잠자리를 다시 마련하려니 짜증스러운 듯 불평하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하다. 한밤의 열기를 견디고 새벽을 맞으면, 요놈의 새들은 한꺼번에 조잘대면서 나의 선 잠을 깨워 이번에는 나를 짜증스럽게 할 것이다.
대숲 아래, 개울가 풀숲에서는 암모기 한 마리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기지개를 켠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날개를 편 다음, 피비린내 나는 외양간을 향하여 비상(飛上)하기 시작한다. 순간, 풀숲 옆에서 잠복하고 있던 개구리의 끈적끈적한 혀가 어둠 속에서 용수철처럼 튀어나오더니 암모기를 낚아챈다. 옆에 있던 수모기가 앵앵거리면서 통곡을 한다.
건너편 야산에서는 멧돼지 가족들이 일렬로 서서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한낮에는 더위에 지쳐 숲 속에서 늘어져 있던 그들은 어둠을 틈타 산을 휘감고 흐르는 개울물을 향하는 중이다. 물가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쩝쩝거리면서 마른 목을 적신다. 새끼 멧돼지는 겁도 없이 첨벙거리며 물속으로 뛰어든다. 어미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용히 하라고 새끼들을 타이른다.
어둠과 적막을 뚫고 길고양이가 갓난아기 울음소리를 내며 집 주위를 배회한다. 소리의 음률이나 강도로 보아 이놈은 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픈 것 같다. 덥고 짜증 나고 배고픈 요즘에는 종족의 번식에 대한 본능보다 생존본능이 앞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리라. 여름날 쓰레기통의 음식은 곧바로 상해버리고 쥐나 새들도 더위를 피해 굴이나 숲 속에서 꼼짝도 않으니 이들도 먹고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닐 것이다.
밤이 깊어져 인적이 드물어지면 들쥐나 길고양이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한다. 저 개들은 무더위에 한낮 내내 늘어진 개팔자처럼 자더니 밤잠마저도 달아났나 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개들이 짖는 것은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선제공격 행위로, 따지고 보면 허장성세인 셈이다. 짖는 개는 물지 않으니까.
먼 곳에서 어둠을 뚫고 밤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기차 속의 사람들은 이 무더운 야밤에 무슨 연유로,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일까? 비록 기차는 한밤의 공기를 가르며 시원하게 내달릴지 모르지만, 쇠바퀴가 레일 위로 구를 때 나는 금속성 소리가 더운 여름밤의 짜증을 더해 준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거리고, 가끔 별똥별이 붉은 선을 그으며 날아간다. 서쪽 하늘에는 그믐달이 수줍은 얼굴을 내밀고 있다. 누군가가 그믐달을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이는 달이라고 한 것처럼, 한밤중의 그믐달은 한여름 밤의 열기를 식혀준다. 저 멀리 들판에는 그믐달의 달빛이 한낮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다.
마을 가장자리 언덕이 끝나는 지점에는 얕은 도랑이 있고 그 위로 잡초가 우거져 있다. 축축한 습기를 유지해 주고 한여름 밤의 열기를 차단해 주는 이곳은 귀뚜라미와 다른 벌레들의 피난처이다. 이곳에서 귀뚜라미 가족들은 밤새 합창하며 조용한 여름밤에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한다. 이에 뒤질세라 베짱이 가족들도 그들의 목청을 가다듬으며 한여름 밤의 합창 대열에 합류한다. 지나가던 땅강아지와 여치도 혼자의 몸으로 그들 주위를 배회하며 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웃거린다. 순식간에 곤충들로 구성된 한밤중의 콘서트 무대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밤새도록 춤추고 노래하며 늦여름 밤의 축제를 즐긴다.
어스름하게 새벽이 밝아올 무렵, 이번에는 수탉들이 홰를 치며 합창 무대에 올라온다. 그들은 마치 콘서트의 종료를 알리는 심벌즈처럼 강렬한 비트로 화려한 밤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이들의 음악소리와 더불어 가을은 저만치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