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말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는 표현의 섬세함과 어휘의 다양성이 아닐까 싶다. 색깔을 나타내는 형용사를 예로 들면, 노란색을 나타내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노랗다”이지만, 노르스름하다, 노리끼리하다, 누렇다, 누리끼리하다 등 색깔의 섬세함과 미묘한 차이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전 세계의 언어 중에서 아마도 우리나라 말이 이렇게 색깔이나 뉘앙스를 가장 다양하게, 그리고 미묘한 부분까지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우리말의 섬세함과 다양성은 물이 흐르는 길을 나타내는 명칭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주위에 있는 토사를 쓸어가기 때문에, 그것이 흘러간 자리는 움푹 파이게 된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물이 흐르는 길은 주위보다 계속 낮아져 점차 깊고 넓어지게 된다. 물길을 표현하는 명칭으로는 실개천, 도랑, 개울, 시내, 개천, 하천, 강 등의 여러 명사가 존재하는데, 이들 어휘들은 그 뜻에 있어서 각각 차이를 나타낸다. 여기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로는 creek, stream, river 등 서너 개 정도의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비해, 우리나라 말은 이렇게 보다 다양한 어휘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실개천은 폭이 매우 좁고 작은 개천을 뜻하고, 도랑은 매우 좁고 작은 개울을 말한다. 개울은 골짜기나 들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시내라는 단어는 골짜기나 평지에서 흐르는 자그마한 내를 가리킨다. 개천은 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길게 판 내라고 정의되어 있으며, 시내보다는 크지만 강보다는 작은 물줄기를 의미한다. 하천은 강과 시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고, 강은 넓고 길게 흐르는 큰 물줄기를 나타낸다. 이러한 용어들은 물길의 크기나 그 길을 따라 흐르는 물의 양의 차이에 따라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실개천이 규모나 수량 면에서 가장 작은 물길이고, 앞에서 정의한 순서대로 그 규모가 커진다고 볼 수 있다.
낙동강이라는 큰 강도 태백산맥 속의 조그만 지류에서 발원하듯이, 큰 강이나 하천도 조그만 실개천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양한 형태의 물 흐르는 길들을 볼 수가 있다. 산 중턱에서 시작된 조그만 물줄기들은 하류로 내려가면서 다른 물줄기들과 합쳐지면서 규모가 커진다. 이 과정을 통해 그 물줄기는 도랑, 개울, 개천, 하천 등의 이름으로 변화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내가 살던 마을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물길들이 존재했다. 마을 주위의 산에서는 실개천이 시작되는 동시에, 그 아래 들판에는 실개천에서 흘러내린 물이 도랑을 이루며 여름철 벼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이 도랑들은 하류로 흘러가면서 점차 그 크기가 커져 개울이나 시내를 이룬 다음, 남해고속도로 입구에 이르러서는 영천강에 합류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규모가 작은 실개천부터 규모가 큰 강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물 흐름의 형태를 다 경험할 수 있는 곳에서 생활해 온 셈이다. 일반적으로 물길이 시작되는 산촌에서는 규모가 큰 강을 보기가 어렵고, 하류의 평야지역에서는 강은 볼 수 있는 반면(그것도 마을 가까이 강이 흘러가는 경우만), 실개천 같은 조그만 지류들은 보기 힘든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특별한 지역에 살고 있었던 셈이다.
나의 고향 마을은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자리 잡고 있고, 앞쪽으로는 연화산에서 발원한 영천강이 굽이쳐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동네이다. 수량이 풍부한 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어 주위에는 건넌들, 사들, 쑥밭 등 넓고 기름진 들판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들판 사이로 실핏줄 같은 수로들이 연결되어 있다.
물이 흘러가는 물길의 여러 형태 중 강은 규모가 크고 넓기 때문에 웅장하고 황량한 느낌이 있는 반면,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없다. 규모가 작은 실개천이나 도랑 등은 그 반대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몸집이 큰 사람은 풍채가 당당하고 위엄이 있어 보이나, 섬세하고 귀여운 면은 없다. 삼라만상의 대부분은 각자 나름대로의 장, 단점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며, 이런 면에서 이들은 모두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물길 중에서도 다소 규모가 작은 개울이나 시내 형태를 좋아한다. 이들은 실개천처럼 너무 작지 않아 인간을 감싸 주는 포근함을 주고, 강이나 하천처럼 너무 크지 않아 우리의 심신을 가라앉히는 안정감을 준다.
고향 마을의 서쪽 편에는 저 멀리 남쪽 산골짜기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시내가 있다. 이 시내는 연중 내내 맑은 물이 흐르면서 시내 속의 물고기들이나 주변의 나무와 풀들의 생명의 보금자리가 되어 왔다. 날이 따뜻해지면 이곳에는 보송보송한 솜털로 뒤덮인 버들강아지가 피어나서 맨 먼저 봄을 알린다. 여름에는 시냇가에 늘어선 수양버들이 처녀의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기다란 줄기를 늘어뜨리고, 가을이면 주변의 억새들이 하얀 꽃을 피우며 바람에 흔들거린다. 겨울에는 꽁꽁 언 얼음장 밑에서도 시냇물이 소리 없이 흐르면서 그 존재를 이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 시내가 품은 시냇물 또한 다양한 생명들의 서식지가 되어 왔다. 시내 바닥에 퇴적되어 있는 모래와 진흙 속은 다슬기나 우렁이, 말조개 같은 패류들의 집이자 놀이터였고, 할아버지 수염처럼 텁수룩한 수양버들 뿌리 사이로는 메기들이 넓적한 주둥이를 벌린 채 하얀 수염을 흔들면서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멸종된 자라들이 딱딱한 등껍질을 짊어지고 느릿느릿 헤엄쳐 다니고, 그 뒤를 따라 작고 앙증맞은 자라 새끼들도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내 바닥에 깔려 있는 돌 틈에서는 민물 게와 가재들이 가느다란 다리를 움직이며 총총하게 내달렸고, 그 위로는 붕어와 납지리들이 유유히 노닐고 있었다. 가을이 되어 수량이 줄어들면 미꾸라지들이 졸졸거리는 시냇물을 따라 일직선으로 행진하면서 내려가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냇물에 통발을 놓아 이들을 가득 잡기도 하였다.
오래전, 나는 삶이 무료해지거나 생활이 피곤해지면 일상생활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 이 곳 시냇가를 찾곤 했다. 수양버들로 포근히 감싸진 시냇가에 앉아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듣고, 물속에서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조용한 시냇가에 앉아 듣는 시냇물 소리는 전원교향곡보다도 더 감미로웠고, 물고기들의 유유자적한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보다도 더 평화로웠다.
하지만, 고향 마을의 시냇물에 대한 이러한 풍경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물이 흐르면서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자연적으로 형성된 시내는 홍수방지를 위한 직강공사로 인해 일직선 행태의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바뀌어 옛 정취를 잃었다. 온갖 생명체들을 품었던 시냇물은 폐비닐과 스티로폼 등 오염물질만 가득하여 이젠 죽음의 물로 변했다. 시냇가에서 봄을 알리던 버들강아지와 여름철 시원한 그늘로 시내를 감싸던 수양버들도 없어진 지 오래다.
프랑스의 샹송 가수 아다모(Salvatore Adamo)의 노래 중에 ‘Le Ruisseau De Mon Enfance’라는 곡이 있다. 원제목은 ‘어린 시절의 시냇가’ 정도로 번역이 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운 시냇가’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제목이 뜻하는 바와 같이 주인공이 어린 시절 뛰놀았던 시냇가에 대한 추억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이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고향의 그리운 시냇가 대신, 삶이 우울해지거나 피곤해지면 나는 이 노래를 듣는다. 비록 그 시냇가는 내 머릿속에 기억의 한 파편으로 남아있지만, 이 노래는 나의 어린 시절의 그리운 시냇가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이것들은 또한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추억과 향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