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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속의 맛-들깨죽

by 여송

다양한 먹거리가 넘쳐나는 요즈음 세상, 아직도 죽이라 하면 배고픔과 가난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듯하다는 속담이 이런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밥을 배불리 못 먹어 죽 먹는 것도 서러운데, 쌀이 아닌 벼논의 잡초인 피 열매로 만든 죽도 제대로 못 먹은 사람을 묘사한 속담이니, 배고픔이라는 고통을 이보다 잘 표현한 말은 없을 듯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죽은 얼마 되지 않은 곡식으로 많은 식구들의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했던 음식이다. 한 줌도 되지 않는 곡식에다가 몇 배나 되는 물을 넣어 만든 이 식품은 먹을 때만 잠시 포만감을 느낄 뿐이지 돌아서고 나면 금세 허기가 지는, 그야말로 근기(根氣) 없는 음식이었다.


죽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동짓날 먹는 팥죽을 비롯하여 호박죽, 깨죽, 잣죽, 콩죽, 전복죽 등이 있으며, 이들은 죽을 만들기 위해 주재료로 사용된 곡류나 식재료에 따라 붙여진 명칭이다. 여러 가지 먹다 남은 음식을 섞어 끓인 죽도 있는데 이 죽은 주재료를 파악하기 어렵고, 돼지 먹이처럼 온갖 잡탕들로 만들어진 죽이어서 꿀꿀이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최근 죽의 재료로 각광받고 있는 작물 중의 하나가 깨이다. 우리나라 농촌에서 재배되는 깨 종류에는 참깨와 들깨 두 가지가 있다. 참깨는 참기름이나 깨소금의 재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들깨보다 더 많이 식재료로 사용되는 작물이다. 들깨 역시 들기름이나 들깻가루의 주재료가 되지마는 이들은 참깨만큼 많이 사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작물은 차라리 깻잎이라는 명칭으로 잎사귀가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참깨는 잎을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깻잎이라 하면 들깻잎을 가리킨다. 이들 식물은 모두 식물성 지방을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참깨의 경우 줄기를 잘라 손으로 비비면 손바닥에 기름이 번들거릴 정도이다.


두 종류의 깨 모두 훌륭한 죽의 재료이지만 요즘같이 더운 여름철에 제격인 죽이 바로 들깨죽이다. 들깨죽이 가진 장점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첫째, 대부분의 죽이 식으면 더 맛이 좋은데 들깨죽이 특히 그렇다. 팥죽처럼 주로 겨울에 먹는 죽을 날씨가 추울 때 차가워진 상태에서 그대로 먹어보라. 아마도 한기(寒氣)에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치면서 드럼 치는 소리를 낼 것이다. 이에 반해 들깨죽은 여름이 제철인 음식이다. 무더위에 입맛이 없고 온몸이 나른한 여름,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냉장된 들깨죽 한 그릇이면 상큼한 들깨 향과 함께 온 몸에 활력이 생기고 원기가 솟구친다.


둘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죽이 한 끼 식사 거리로는 미진한 면이 있지만 들깨죽은 죽만으로도 식사의 대용이 될 수 있다. 들깨죽에는 통상 감자나 토란 등이 들어가기 때문에 죽만으로도 든든한 한 끼의 식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죽에는 곡물 외에 다양한 야채도 들어가 훌륭한 건강식이 된다. 대부분의 죽이 주된 재료와 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들깨죽에는 주재료인 들깨 외에 감자나 토란, 심지어 머위, 죽순, 미역 등의 채소도 들어간다. 따라서 이 죽은 우리 몸에 필요한 여러 가지 영양소를 균형 있게 제공하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재료가 값싸 경제적이다. 전복죽이나 잣죽 등에 비해 들깨죽의 원료인 들깨와 부재료들도 값싸고 구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머위와 죽순의 경우 시골서는 쉽게, 무료로 구할 수 있지만 도회지에서는 구하기가 쉬운 편은 아니다.


다섯째, 들깨는 다른 작물들에는 부족한, 사람의 몸에 좋은 여러 가지 물질들을 함유하고 있다. 들깨에 들어 있는 오메가 3나 감마토코페롤은 혈관의 노폐물을 제거해 주고 노화를 예방한다고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들깨에는 불용성 식이섬유가 풍부해 변비 예방이나 장속의 유해물질은 배출해 준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시골에서는 들깨죽을 "깨죽국"이라고도 불렀다. 이 단어가 뜻하는 대로 들깨죽은 죽이 될 수도 있고 국이 될 수도 있다. 죽이라는 독립적인 존재로 한 끼 식사의 주역이 될 수도 있고, 국이라는 보조적인 메뉴로 식탁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들깨죽은 예전 우리의 식생활에서 주연과 조연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특히 이 죽은 초여름, 모내기철에는 새참이나 점심식사의 반찬으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었다.


요즘과는 달리 냉방시설이 전무했던 옛적, 뜨거운 밥과 국이 주된 우리의 식문화에서 여름철 식사는 일종의 고역이었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지만, 들어가는 투입물(input, 음식물) 보다 나오는 산출물(output, 땀 등)이 더 많은 상황에서, 시원하게 식은 들깨죽은 한여름에 인기 있는 메뉴일 수밖에 없었다. 들깨죽은 식은 밥과도 잘 어울리기 때문에 이 두 메뉴를 이용하면 더욱더 시원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나는 들깨죽을 맛보기 위해 해마다 들깨를 심는다. 올해도 7월 초, 들깨 모종을 텃밭에 이식을 하였다. 들깨는 다른 작물에 비해 파종과 수확시기가 늦다. 한쪽에서는 이미 심어놓은 콩이 제법 많이 자랐다. 며칠 전, 들깨가루를 빻기 위해 작년에 수확해 둔 들깨 봉지를 들고 재래시장의 방앗간을 찾았다. 들깨가루는 시중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맛이나 식품의 유해성 측면에서 어찌 내 손으로 직접 재배한 것에 비하랴?



강렬한 여름 햇빛에 달구어진 시장 입구의 아스팔트 길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러나 이것은 방앗간의 내부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그곳은 깨 볶는 솥에서 나오는 열기로 잠시만 앉아 있어도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주인아줌마는 선풍기를 내 쪽으로 돌려준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다른 곳보다 느리게 가는 것 같다. 한참 기다려서야 아주머니는 껍질을 제거한(除皮) 들깻가루로 가득 찬 묵직한 비닐봉지를 건네주었다. 죽이나 시래깃국에 사용되는 들깨가루는 껍질을 제거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껍질을 제거하지 않은 들깨가루는 억세고 거칠어서 식감이 좋지 못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집 앞 언덕에 있는 머위를 채취하였다. 머위 줄기는 들깨죽과 찰떡궁합을 이룬다. 풀숲에 숨어 있던 모기들이 오랜만에 사람 냄새를 맡고 저돌적으로 달려든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할 수 없지 뭐... 나는 헌혈하는 셈 치고 모기에게 약간의 피를 헌납하였다. 이런 봉사에도 아랑곳없이 모기들은 내 몸에 파이프를 박은 후 사정없이 혈액의 응고를 방지하는 항응고제를 주입한다. 헌혈한 피는 아깝지 않으나 물린 곳의 가려움에 대한 보상은 어디서 받아야 하나?


집 안으로 들어와 초여름에 삶아 냉동실에 넣어둔 죽순을 꺼내 해동시키고 건미역을 물에 불려놓았다. 머위 줄기도 껍질을 벗겨 삶은 후 쓴맛을 우려내기 위해 찬물에 담근 후 감자를 깎아 잘게 썰었다. 그다음, 냉동된 조개와 건멸치, 젓국장을 넣고 육수를 끓이기 시작하였다. 죽을 끓일 때 맹물을 넣으면 맛이 떨어지므로 육수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육수 만들 때 일반 국간장보다는 젓국장을 넣는 것이 음식 맛의 깊이를 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간장은 멸치액젓을 달여 만든 것으로서, 우리 집 요리의 비법 재료이다. 이는 들깨죽뿐만 아니라 미역국, 심지어 김치찌개에도 적용될 수 있는 조리법이다. 젓국장이 없으면 마트에서 파는 멸치액젓이나 까나리액젓을 사용하면 된다.


육수가 완성될 무렵, 이미 불려놓았던 찹쌀을 믹서에 넣고 갈기 시작하였다. 멥쌀 대신 찹쌀을 사용하면 훨씬 차지고 맛있는 죽이 되기 때문에 나는 주로 찹쌀을 사용한다. 찹쌀이 부드럽게 갈린 것을 확인한 후 커다란 냄비에 들깨가루와 이미 갈아 놓은 찹쌀물을 넣었다. 들깨가루가 많이 들어갈수록 맛은 고소하고 들깨 향도 진하다. 무게를 기준으로 들깨가루는 찹쌀의 절반 이상은 되어야 된다.


이미 손질해 둔 감자와 채소, 육수를 커다란 냄비에 넣은 후 물을 더 첨가하여 죽을 끓이기 시작하였다. 가스레인지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방앗간 열기 못지않다. 30여 분 동안 주걱으로 죽을 젓는 사투를 벌인 끝에 드디어 들깨죽이 완성되었다.



냉장고에서 들깨죽을 꺼내 큰 대접에 가득 담았다.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면 제일 먼저 고소하고 향긋한 들깨 향이 입 안 가득히 퍼지면서 나를 추억 속의 유년 시절로 인도한다. 곧이어 입에 달라붙는 듯한 찹쌀의 끈적거림이 혀 속으로 스며든다. 그 뒤로 머위 향이 콧속으로 퍼지고, 진하게 우러난 미역과 조개국물이 해연(海淵)의 깊은 맛을 가져다준다. 이빨 사이로 파고드는 죽순의 아삭한 식감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부드럽다. 나는 이 한 그릇의 음식에서 시공을 초월한 세계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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