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립니다.
황량한 들판에는 때 이른 안개가 자욱하고 그 사이로 야트막한 산봉우리들이 얼굴을 내밉니다. 안개는 겨우내 짓눌렸던 내 마음을 무거운 질량으로 억누릅니다. 안개 사이로 햇살이 비칩니다.
두꺼운 외투로 무장하여 다시는 물러설 것 같지 않던 동장군의 위세도 따스한 햇볕과 산들거리는 미풍 앞에서는 엄마 품속의 아기처럼 나약해집니다.
저 건너편 언덕 위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어오릅니다. 햇빛을 받아 더워진 공기가 올라와 찬 공기와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나에게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황홀한 군무를 보고 있노라니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것 같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천사들은 더 멀리 달아납니다. 할 수 없이 나는 멀찍이 서서 이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차가운 겨울의 체온으로 꽁꽁 얼었던 골짜기의 시냇물은 봄을 재촉하는 빗방울에 화로 위의 양초처럼 무너져 내립니다. 개울물은 졸졸졸 휘파람을 불며 흐르면서 주위의 동토를 녹이고, 때맞춰 겨우내 움츠렸던 봄나물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언덕 아래 양지바른 곳에서는 제일 먼저 쑥이 하얀 새싹을 땅 밖으로 밀어냅니다. 벌써부터 입가에 쑥 향기가 감도는 듯합니다. 추운 겨울 동안 잃어버린 입맛을 돋우고 상처나 배앓이를 치료해 주던, 이 나약해 보이면서도 강인한 식물은 어쩌면 우리네 엄마를 닮았습니다. 나는 바구니와 칼을 챙겨 커다란 손에 잡히지도 않는 조그만 봄의 전령을 캐면서 어린아이로 돌아갑니다.
개울가에는 버들강아지가 피어 미풍에 한들거립니다. 보슬보슬한 하얀 털이 어린아이의 솜털처럼 보드랍습니다. 버들강아지 하나를 따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오요" 하면서 부릅니다. 귀여운 강아지처럼 이내 얼굴 쪽으로 구르면서 다가옵니다. 나는 또다시 동심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야트막한 개울물을 따라 송사리 가족이 소풍을 나왔습니다. 두꺼운 얼음장 밑에서 추운 겨울을 보낸 후 처음 맞이하는 나들이라 어리둥절하나 봅니다. 어미는 어린 새끼들이 길을 잃을까 봐 바쁘게 쏘다닙니다. 그래도 신나는지 송사리들은 힘차게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요리조리 헤엄을 칩니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고라니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내려옵니다. 아마 겨울잠에서 깨어나 갈증이 나는 모양입니다. 얼굴은 수척하고 퀭하니 팬 눈에 초점까지 잃었습니다.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속의 봄기운을 마시고 기운을 차리겠지요.
밭둑에 서있는 매화나무 가지마다 볼록볼록 움이 맺혔습니다. 마치 수줍은 소녀의 젖가슴처럼 살짝 부풀어 올랐습니다. 조만간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입니다. 비둘기 한 쌍이 나뭇가지에 다정히 앉아 다가오는 봄을 기다립니다. 얼마 안 있어 이들도 둥지를 틀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것입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동산 중턱 무덤가에는 할미꽃이 함초롬히 피어났습니다. 자주색 빛깔은 무덤 주인의 한 맺힌 삶에 대한 피맺힌 절규입니다. 외로이 서서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모습을 보니 측은하기 그지없습니다. 꽃봉오리를 바로 세워 놓아도 곧바로 힘없이 고개를 떨굽니다.
할머니의 쪽진 머리 속 가르마 같은 밭고랑을 따라 난 오솔길에는 보라색 바이올렛이 잔디를 비집고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순수한 소녀처럼 해맑은 이 꽃의 꽃말은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 주위로 하얀 민들레꽃이 방긋 웃으며 자기도 봐달라고 조릅니다. 봄기운이 강해지면 갖가지 색깔의 나비들과 윙윙거리는 꿀벌들이 이 해맑은 얼굴 위로 사뿐히 내려앉을 것입니다.
양지바른 토담집 담벼락에는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노란 버스에서 내린 노란색 복장의 꼬마 녀석들이 담벼락 아래로 지나갑니다. 저만치 마중 나온 엄마를 보자 꼬마들의 얼굴이 개나리처럼 환해집니다.
파릇파릇한 보리밭 위로 종달새가 날아오릅니다. 파란 하늘을 무대로 비이 비이 배 뱃종 종잘거립니다. 노랫소리는 은방울 소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 어깨 위로 쏟아집니다. 그 들판 사이로, 아직은 차가운 바람에 볼이 발그레 상기된 처녀가 걸어옵니다. 하지만 걸음걸이는 경쾌하고 옷차림은 가볍고 화사해졌습니다.
집 앞 언덕 아래에서는 두꺼운 흙 이불을 뚫고 달래가 파랗게 솟아오릅니다. 땅 속에 묻힌 뿌리는 할머니의 머릿결처럼 하얗고 향기롭습니다. 나는 그 향기가 그리워 이 연약한 식물이 하루빨리 자라나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이 움트는 땅속을 파헤치고 나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를 심습니다. 이 나무들은 내년 봄에는 잎이 나고 꽃을 피우면서 새로운 봄을 알리겠지요. 몇 년이 지나면 나무마다 주렁주렁 탐스런 과일이 열릴 겁니다. 과일나무는 나에게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또다시 봄을 맞이할 거라는 한 가닥의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