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한참 지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메마른 대지에는 한기(寒氣)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영하의 기온 속에 하얀 서리가 들판을 뒤덮었고, 길가의 야트막한 웅덩이 속에는 살얼음이 뚜껑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는지 한낮에는 다소 포근해지더니 흐린 하늘에서 차갑고 딱딱한 눈송이 대신 보드라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절기가 바뀌는 것은 비가 알려준다고 하듯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인 이맘때 내리는 비는 춥고 지루한 겨울이 끝나간다는 희망의 비입니다. 봄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이 비는 또한 땅 속에서 움츠리고 있는 뭇 생명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활력의 비입니다. "가을비는 내복 한 벌"이라는 속담에 맞춰, 사람들도 지난가을에 껴입었던 속옷을 이 봄비가 지나고 나면 한 꺼풀씩 벗겠지요. 이 비는 겨우내 얼어붙었던 인간의 몸과 마음을 녹인 후, 땅 속으로 스며들어 동토의 세계에서 겨울잠에 빠진 온갖 동식물들을 깨울 겁니다.
봄비가 내리면 제일 먼저 쑥, 냉이, 달래 등 봄나물이 머리를 내밉니다. 이 나물들은 겨울 내내 추위로 잃었던 사람들의 입맛을 돋우고 나약해진 그들의 몸에 활력소가 되어 활기를 북돋아 줄 것입니다. 이들 봄나물 사이로 봄맞이꽃이 대지를 박차고 솟아나 이름 그대로 봄을 맞이합니다. 그 뒤를 이어 민들레, 제비꽃들도 봄비로 촉촉이 젖은 땅 위로 해맑은 얼굴을 속속 드러냅니다.
저 멀리 솟은 산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봄비는 산골짝의 대지를 적시며 온갖 동식물들에게 봄소식을 전한 다음 산모퉁이를 돌아 마을 쪽으로 내려옵니다. 빗줄기 사이로 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라 산허리를 감싸고돕니다. 봄비는 이번에는 활기찬 시냇물이 되어 마을 입구의 물레방아를 흔들어 깨웁니다. 겨우내 잠자던 물레방아가 기지개를 켜면서 힘차게 돌아갑니다. 방앗간에서 모이를 쪼던 참새들이 요란한 소리에 놀라 줄행랑을 칩니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한 무리의 송사리 떼가 힘차게 물결을 거슬러 올라옵니다. 그들은 맑은 날이면 산 그림자가 어슬렁거리는 산기슭에 다다른 후 물풀들로 보금자리를 꾸미고 조그마한 알들을 산란합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이 알들은 부화한 후 어미가 올라온 그 물길을 따라 다시 내려갈 것입니다. 억만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 온 생명의 끈은 이 외딴 산골짜기에서도 계속됩니다. 아직까지 골짜기의 시냇물은 차갑지만, 흘러내리는 봄비를 따라 그 냇물 속에도 봄은 이미 와 있습니다.
바람막이라고는 하나 없는 휑한 벌판에서 모진 북풍과 홀로 맞서 싸우던 보리밭에도 봄비는 소리 없이 떨어집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누렇게 뜬 보리 잎사귀에도 봄비는 사뿐히 내려앉았습니다. 가느다란 잎 끝에는 빗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진주처럼 영롱하게 빛납니다. 봄비는 이 보리에게도 생기를 불어넣어 조만간 파릇파릇한 이파리를 펼치며 건강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보리를 이불 삼아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땅강아지 한 마리가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선잠을 깬 듯 눈을 비비며 땅 위로 기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생명체에겐 아직 철이 이른 듯 곧바로 땅속으로 들어가 다시 잠을 청합니다.
마을 어귀, 논가에 자리 잡은 툼벙에도 봄비는 흘러듭니다. 개구리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이곳으로 모여듭니다. 개구리들은 목청을 돋우어 밤낮으로 세레나데를 부르며 짝을 찾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알을 낳아 후손들을 번식시킵니다. 좁고 컴컴하여 감옥 같은 이곳에도 봄비는 내리고 봄은 찾아옵니다.
곧이어 이 비는 마을 앞 언덕 위에 높다랗게 서 있는 버드나무에게로 향한 다음, 땅속 깊은 곳에서 잠들고 있던 버드나무 뿌리에게 다가가 봄이 왔으니 일어나라고 재촉합니다. 버드나무 뿌리는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면서 봄비를 한 모금 마십니다. 이 빗물은 버드나무의 줄기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얼마 지나지 않아 버드나무 가지에 연녹색의 잎이 돋아날 것입니다.
까치 한 쌍이 버드나무 위에서 온몸으로 봄비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 비는 이젠 그리 차갑지 않습니다. 아직은 물러서지 못하겠다는 듯이 떡 버티고 서 있는 겨울이라는 괴물의 눈을 피해 봄비 속에 숨어들었던 봄의 전령이 까치에게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까치 역시 높다란 미루나무 위에 나뭇가지와 깃털로 둥지를 만듭니다. 그들의 날갯짓은 보다 날렵해졌고, 노랫소리는 보다 경쾌해졌습니다. 그들은 봄비가 가져다준 봄의 기운으로 조만간 새 생명을 잉태하여 종족을 유지하려는 본능을 이어갈 것입니다.
한적한 시골마을, 좁다란 돌담길을 따라 늘어선 개나리도 봄비를 머금었습니다. 죽은 나뭇가지처럼 메마르고 투박하던 개나리 나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빗물은 개나리의 요술에 의해 노란 물감이 되어 나무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꽃잎을 물들입니다. 개나리 꽃잎에서 흘러내린 물감으로 노랗게 물든 병아리 떼들이 어미닭의 꽁무니에 붙어 종종걸음으로 골목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오후가 되어 비는 그치고 구름 사이로 가느다란 햇살이 비춥니다. 백발이 성성한 농부가 올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지게를 지고 산비탈의 밭으로 향합니다. 겨우내 칙칙한 외양간과 손바닥만 한 개집에 갇혀 있던 황소와 강아지도 동행했습니다. 모처럼의 외출이라 모두가 신이 났습니다. 강아지는 맨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깡충거리고, 황소는 소처럼 순한 눈깔을 부라리더니 이마에 난 뿔로 사정없이 허공을 들이받으며 벌떡벌떡 날뜁니다. 소고삐를 쥔 채 묵묵히 뒤따라가던 농부의 주름진 얼굴이 모처럼 환하게 펴졌습니다.
나는 사계절 중 봄을 제일 좋아합니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옛 시절, 추위와 배고픔으로 지친 겨울이 빨리 지나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부모님이 지어 주신 내 이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봄 중에서도 춘삼월 화려하고 무르익은 봄보다는 겨울이 막 끝나가는 2월의 초봄을 더 좋아합니다. 한창때의 봄은 곧 끝날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 반면, 이제 막 시작되려는 봄은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춘삼월 봄은 농염한 여인의 봄이라면, 2월의 봄은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소녀의 봄이라 할까요?
봄이 막 시작되는 2월 들어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것은 봄비입니다. 이 무렵의 비는 단순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아니라 긴 겨울잠에 빠져 있는 대지를 깨우는 선각자입니다. 그러기에 봄비는 고난의 계절이 지나갔다는 안도의 한숨이요, 따뜻하고 생동감 넘치는 계절이 가까이 왔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겠지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힘든 시기를 참고 이겨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정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 오르는 산악인들도 막상 정상을 정복하면 허무함이 엄습하듯이, 인생도 각자가 설정한 목표의 달성 그 자체보다는 그 목표를 성취하기까지의 과정이 더 중요하고 보람찬 일이 아닐는지요. 이는 결국 인간은 인생의 목표를 향해 매일매일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봄비가 지나간 후 한결 따스해진 봄 날씨에 나는 두꺼운 외투를 벗습니다. 따사로운 봄 햇살에 몸과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나는 봄비와 함께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봄을 활기차게 맞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