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우리 곁으로 다가서다

by 여송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엘리엇(T. S. Eliot), <황무지(The Waste Land)>의 일부-


4월은 생물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 부활하는 시기이다. 겨우내 황무지처럼 황량했던 대지에는 온갖 야생화들이 싹을 틔웠고,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는 봄꽃들이 탐스런 꽃봉오리를 터트렸다. 하지만 이런 찬란한 부활을 있게 한 어미들의 희생은 화려하게 치장한 대지 아래로 묻히고 말았다. 마치 자신의 육신을 제물로 바쳐 새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살모사처럼.


잔인한 4월도 어느덧 흘러가고 5월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기세 등등하게 자라난 새싹들과 나뭇잎들은 발산개세(拔山蓋世)의 기개(氣槪)로 온 산하를 초록빛으로 물들였고, 봄꽃이 진 자리에는 갖가지 열매들이 알알이 맺혔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비둘기의 날갯짓에도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만물에 생동감이 넘치는 5월은 가히 계절의 여왕이라고 할 만하다.


집 앞 밭둑에는 애기똥풀이 노란 꽃망울을 터트렸다. 이들은 마치 인해전술을 펼치듯 이른 봄부터 그곳에서 자리 잡고 있던 머위들을 덮쳐버렸다. 생존력 강하기로 이름난 머위들도 무더기로 달려드는 이들을 감당할 수 없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 풀도 점차 세력이 약해질 것이고, 그 틈을 노려 머위는 다시 세력을 확장할 것이다. 왕성한 애기똥풀 사이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머위들이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고 있는 패잔병처럼 안쓰러워 보인다.

담장 밑에 자리한 복숭아나무에는 복숭아 열매가 줄줄이 열렸다. 3년 전 묘목을 심은 후에 처음으로 맺은 결실이다. 수밀도(水蜜桃)의 향기가 벌써부터 코끝에 스치는 듯하다. 어린아이의 피부처럼 고운 빛깔의 복숭아를 얻기 위해서는 종이 봉지로 어린 열매를 싸야 하지만, 이들의 앙증맞은 자태를 감상하기 위해 그 작업을 기꺼이 포기하기로 한다.

뒷마당에 심은 상추도 초여름의 날씨에 싱싱하게 자라났다. 작년 가을, 높다랗게 자란 상추 줄기의 끝부분에 맺힌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서 겨울을 보낸 후 봄이 되자 싹을 틔웠다. 소담하게 자라난 어린 모종들을 한 포기씩 떼어내어 일렬로 심었더니 모두 생존하였고,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왕성하게 자라난 것이다. 혹한의 겨울을 이겨낸 상추의 종족 보존 본능이 눈물겹도록 처절하다.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뚫고 청개구리 한 마리가 돌계단 위로 뛰어오른다. 잔인한 4월을 무사히 보낸 이 가냘픈 생명체도 5월이 되자 왕성한 기력을 회복하였다. 진한 녹색으로 물든 피부와 수정체처럼 맑은 눈동자가 강한 생명력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하다. 뜨거워진 햇볕에 행여 피부가 말라 호흡곤란 증세를 보일까 두려워 이 녀석을 풀숲으로 몰아내었다.

온갖 생명들이 부활하는 5월에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생명체도 있다. 지난가을에 심은 쪽파는 그동안의 노력의 결실을 뿌리(실은 덩이줄기)에 저장해 둔 채 잎사귀가 시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후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바짝 말린 쪽파의 뿌리는 초가을, 땅속으로 들어가 다시 싹을 틔워 후손을 번창시킬 것이다.

담벼락 아래의 텃밭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민들레는 솜사탕 같은 홀씨들을 피워내었다. 아직까지 홀씨를 맺지 못한 하얀 민들레꽃도 보인다. 외래종인 노란 민들레가 온 들판을 점령한 오늘날, 토종인 하얀 민들레가 간신히 생명을 지탱해 가는 모습이 처량하여 뽑아버리지 않았더니 이렇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 하얀 민들레는 우리 조상들의 변치 않는 마음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옛날 사람들은 여인의 정절이나 충신의 절개를 표현할 때 이 민들레를 인용하곤 했다. ‘일편단심(一片丹心) 민들레’라는 말은 민들레의 이러한 속성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민들레 홀씨가 하나 둘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이들은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이젠 엄마 품으로부터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담장 밑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이들은 미지의 세계로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척박한 환경에서도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갈 것이다. 민들레 홀씨를 날리면서 여름은 어느덧 우리 곁으로 다가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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