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진(望診)
장상군은 품 안에서 약을 꺼내 진월인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 약을 땅에 떨어지지 않는 물에 타서 마신 뒤
30일이 지나면 반드시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오.”
사마천, 『사기』
중국 전설의 명의 편작은 ‘망진(望診)’이라는 특출난 기예가 있었다. 젊은 시절 그의 이름은 진월인으로 어느 여관의 종업원이었다. 그는 매우 성실했는데, 그의 됨됨이를 높게 산 10년 단골 노인이 그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그를 제자로 삼기로 한 날, 평생의 비방이 적힌 교과서를 건넨다. 10년간 사람됨을 지켜본 선생도 지독하지만, 꾸준히 성실함을 지켜온 젊은이의 노력도 참 대단했다는 이야기다.
신비한 서적과 함께 노인이 가르쳐 준 또 한가지 비법이 있었다. 그가 건네는 신비의 영약을 땅에 떨어지지 않는 빗물이나 이슬로 먹는 얼토당토 않은 짓이었다. 의지의 젊은이는 그 당시에 이미 단군 신화를 탐독했는지, 통과의례를 수료했다. 그러자 그의 능력은 어느덧 담장을 투시하여 그 너머의 사람을 보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의 망진법의 경지는 환자를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 사람 안의 모든 장기를 살펴볼 수 있어서 환자를 손으로 만져보거나 진맥할 필요가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 손이 닿아야 '진찰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므로 편작은 그저 형식적으로 신체 검진을 하였다.
즉, 편작에게는 현대의학에서도 기본적으로 중시하는 신체 검진이 그에게는 이미 요식행위에 불과한 일이었다. 겨우 흐릿한 그림자나 볼 수 있는 CT나 MRI같은 고가의 첨단 검사도 그의 망진앞에는 시간낭비였을 것이다. 편작에게 ‘죽은 자를 살려냈다’는 신화를 만들어준 증례 보고를 읽어보면, 어떤 나라의 왕자가 별안간 죽게 되어 입관 채비를 하던 차에 우연찮게 그가 방문한 일로 시작한다. 그는 죽은 왕자의 증상과 병력을 듣더니 ‘시궐(尸厥)’이라는 진단을 붙였다. ‘시궐’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정신이 아찔하여 급작스레 엎드려져서 까무러치는 병’이라고 쓰여 있다. 현대의학의 관점으로 이해하자면, 왕자의 병은 syncope(실신)으로 유추할 수 있는데, 근거는 실신의 영어 발음(신코프)과 시궐의 사이의 까무러칠 정도로 유사한 발음에서 마음대로 추정했다. 어쨌거나 왕자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살아나서, 편작은 명의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다.
입원한 환자를 둘러보는 ‘회진(回診)’이라는 말은, 근대 의학의 모태였던 미국의 Johns Hopkin’s 병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이 병원의 초창기 건물의 병실 구조는 층의 가운데가 뚤린 방사형 원형구조였다. 환자들을 다 살펴보려면 한 층의 복도를 둥글게 한 바퀴 돌아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rounding’을 했던 것이다. 회진은 드라마에서 보듯 의사의 흰 가운의 수가 많고 길수록 권위 있고 멋진 의례인데, 의사의 급이 올라갈수록 동행하는 주변 의사의 수는 증가한다. (여기서 문단을 한 번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학생 시절 목도한 외과 과장님의 월요일 병동 회진은 병동의 복도가 50여개의 흰 가운으로 가득찬 진풍경이었다. 흰 가운의 물결이 방역차의 연기 같은 느낌과 흡사했는데, 실습 학생들은 어릴 때 연기를 따라다니는 어린이가 다시 된 것처럼 회진을 따라 돌았다. 물론 앞 사람 목소리도 안 들리는 그 비효율적인 의식은 지금은 없어졌다. 인턴 시절, 내가 했던 회진 때의 내 역할은 병실 문을 열어 해당 교수님을 담당 환자의 코앞까지 안내하고, 고명하신 분들의 짧은 메시지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병실 안 텔레비전의 잡소리를을 끄는 일이었다. 전공의 시절에 회진을 모셨던 모 교수님께서는 병실 안에 누워 있는 환자를 복도에서 지긋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명의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혹시 그 분도 젊은 날에 빗물(이슬?)을 많이 드셔서 이미 망진의 도를 깨우쳤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개의 병원은 한 지정의의 담당 환자가 몇 개의 병동에 분산되어 입원하고 있다. 이 분산의 범위는 오는 환자 마다할 수 없어 세부 진료의 범위가 광활한 젊은 교수일수록 비교적 큰 편이다. 내게 봉급을 주는 병원은 건물이 두 개여서 회진의 이동거리는 꽤 긴 편이다. 이 시간이 내가 하는 신체 활동의 거의 전부인지라 고맙게 받아 드리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잘 되지는 않는다.
회진의 시작은 환자의 일차적인 문제를 수시로 파악하고 있는 ‘주치의’라고 불리는 담당 전공의를 어렵사리 만나는 일에서 시작된다. 바쁜 전공의 선생을 만나지 못하면 환자 명부가 담긴 종이 찌라시를 펼쳐 들고 우편 배달부처럼 쓸쓸하게 혼자 회진을 돌 수도 있지만, 환자들 보기 민망하여 꼭 전공의를 기다린다. 하루 종일 기다려 지정의를 만나는 회진이라는 의식에 등장인물이 주연뿐이면, 내 환자들은 옆 환자들 보기에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옛날의 전공의들은 환자들의 문제를 자기주도적으로 발견하여 문제를 매끄럽게 해결하고 지정의에게 중요 사항을 보고했다면, 요즘의 문화는 지정의가 문제를 발견하여 해결책을 친절하게 알려줘야 한다. 전공의의 능력이 과거보다 떨어졌다기보다는, 고도로 전문적으로 분화된 시대에 더하여 자율성의 가치는 환영받지 못하는 세태의 폐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지정의가 예민하지 못하면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고 환자의 문제를 방치하게 된다는 말이다. 명의의 망진(望診)이 아니라, 자칫하면 망하는 진료, 망진(亡診)이 되기 쉽다.
다행히 특진 교수의 환자들에게는 완충장치가 있는데, 이는 바로 ‘전임의’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대학병원의 유명 교수들에게는 그 곁에서 배우려는 젊은 전문의, 즉 전임의들이 있다. 벌써 옛날 말이 돼버린 ‘특진비’라는 것은 결국 명의에게 진료받는 프리미엄이라기 보다는 명의를 결사옹위하는 전임의들에게 받는 암행 특별진료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 의사들은 전공의가 못 보는 지점과 고명하신 교수님들이 일일이 못 챙기는 부분을 적절히 메우어내는 질 높은 헌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정부의 특진비를 결국 없애고야 말겠다는 정부의 시책에 맞추어,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특진 교수가 아니다. 그래서 이름대로 보통 진료를 해야 하는데, 그 진료의 수준은 담당 전공의를 잘 만나는 일에서 출발한다. 전공의의 상태가 다행히 좋더라도,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회진을 즐거운 마음으로 돌기가 힘들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근심하면서 사는 존재인데, 의사라는 직업은 본인의 근심에 더하여 남의 근심까지도 밤낮없이 떠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불행하다.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네것은 1964년에 펴낸 그의 소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에서 “환자를 치료할 때 느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공포에 빠뜨린 다음 다시 안전하게 구출하는 겁니다.”라고 썼다. 의사의 불행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의 말이 맞는다면 ‘환자를 치료할 때 느끼는 가장 큰 우울함은 인터넷으로 질병 정보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희망으로 들뜨게 한 후에 안전하게 구출하지 못하는 겁니다.’ 라고 바꿔도 맞을 것이다. 모든 환자분들이 안전하게 구출되길 바라며, 망진의 도를 깨치지 못한 나는, 창밖으로 내리는 겨울비를 받아 놓아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