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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 호빵맨 Aug 08. 2018

명의

"환자가 된 의사들은 담당의사를 선택하는 데 있어 명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종종 통절히 깨닫는다. 명성과 실제  임상의사로서의 기량 사이의 차이가 때로는 충격적일 정도다."

-. 로버트 클리츠먼 2016  환자가 된 의사들 

 

의대 3학년 내과 실습 때 일이다. 간 명의라 불리던 L 교수님께 실습이 배정된 동기 형이 깊은 감동을 받고 해준 얘기다. L 교수님께서 오전 회진 때 환자의 눈을 친히 뒤집어보더니, 오늘 빌리루빈 수치가 2.5 정도 될 것이라고 환자에게 간 기능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설명하더라는 것이다. 오후에 실제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수치가 거의 비슷하게 나와 그 신체검진의 정확함에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다. 인턴으로 돌던 혈액종양내과 병동도 생각난다. 혈액종양내과 의사는 암과 주로 싸우지만, 항암제가 불러오는 또 다른 적 미생물과도 뜻하지 않게 싸워야 했다. 간혹 이 싸움에 집중하다 보면 피아 구분이 모호해져 환자와도 싸우고, 간호사와도 싸우기도 했다. 이 병동에 감염내과 의사들은 비교적 갑의 형태로 출현하는데, 내과 주치의들이 오매불망 회진을 기다리던 O 교수님이 원인 불명의 발열을 겪고 있던 환자의 숨소리만 듣고 좌하엽에 폐렴이 생겼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청진기도 안 대고 진단을 붙여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에 CT를 찍었더니 진단이 맞았다고, 역시 대가는 다르다고 감탄을 거듭하였다.

 

 이렇듯 명의는 범인들이 보기에 신비한 능력을 가진 의사로 얼굴을 한번 보거나 심지어 진료실에 걸어 들어오는 소리만 듣고도 진단을 붙인다. 드라마 [허준]에 나오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산음 땅의 명의로, 아들 등에 업혀온 노인네를 진맥도 하지 않고 ‘이미 죽은 사람’이 잘못 왔다며 타박을 하고 돌려보낸다. 역시 명의의 진단대로 그 노인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사망했다. 외과계 최고 명의는 단연 드라마 [하얀거탑]의 장준혁이다. 그는 등장 씬에서부터 눈부신 수술 실력을 뽐내고, 환자의 심장이 멈춰 위태로울 때 수줍은 일반외과 의사의 금기를 넘어 횡격막을 열고 심장을 손으로 직접 압박하였고, 심지어 심장에 신비한 주사를 꽂아 환자를 살려냈다. 하지만 탈장수술 실력은 그저 그랬는지, 3명의 조수와 한 시간 넘게 사투를 하는 것으로 그려져서 천재 외과의사에게도 탈장수술은 어려운 수술이라는 상식을 전파하였다.

 

인터넷에 온갖 명의들의 이름이 떠돈다. 10대 명의, 50대 명의, 100대 병의, 의사가 뽑은 명의, 기자가 뽑은 명의 등등 종류는 가지가지나 그분들이 그분들이다. 업데이트가 잘 안 되는 리스트에는 이미 은퇴하신 교수님을 그것도 잘못된 함자로 올리는 경우도 심심찮다. 요즘은 전공과목이 너무 세분화된 시대라 그 과목에 맞는 의사를 잘 찾아가는 게 명의를 만나는 첩경이다. 그래서 지금 회사에서 잘리게 될 때, 내가 생각하는 입에 풀칠할 아이템 중 하나가 ‘명의를 골라드립니다’로 명의가 찾는 분들께 진짜 명의를 소개해주는 컨설팅이다. 최근 모 신문은 “명의 예감”이라는 섹션을 만들어 차고 넘치는 명의들을 마다하고 신선한 예비 명의들을 많이 발굴해오고 있다. 모 방송국의 “명의” 프로그램은 또 어떤가? 명의들의 다정한 진료와 병에 걸린 환자와 가족들이 수술장 앞에서 우는 장면 그리고 잘 회복하여 퇴원하는 것 등의 훈훈한 결말을 매회 보여준다. 여기에는 꼭 출연하는 고정 배역이 있다. 수술 한 지 오래된 환자로 수술 후 시골로 내려가 텃밭에서 기른 자연 식단으로 바꿔서 암이 완치되었노라고 인터뷰를 한다. 심지어 어떤 프로그램은 “명의가 골라주는 약이 되는 밥상”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제목부터 가련하다. 단언컨대 이 시대의 명의들은 이런 ‘약이 되는 밥상’을 드실 시간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명의는 그저 이름난 의사가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가진 한가한 의사다. 내가 여유가 있어야 남을 잘 돌봐줄 수가 있다. 명의라 불리는 바쁜 의사들은 다른 환자 때문에 내 앞의 환자에게 쓸 시간이 없다. 하루에 8명을 수술하는 의사와 2명을 수술하는 의사 중 어떤 의사가 수술대에 누워있는 환자 옆에 오래 있겠는가? 하루에 150명의 외래 진료를 하는 의사와 30명의 진료를 하는 의사 중 어떤 의사가 내 말에 더 귀 기울이겠는가? 명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현대의 의료는 질병의 재발 유무를 객관적인 수치와 영상으로 확인한다. 그만큼 진료의 수준이 평준화되었다. 외래 진료하기 전에 의사들은 당일 예약된 환자들의 최근 검사 결과를 요약해서 미리 전자차트에 적어놓는데, 환자 얼굴도 보기 전에 진단을 붙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답이 모니터에 다 적혀있으니, 환자 얼굴을 보고 할 얘기가 없는 것이다. 차트가 없던 시절 고전적 명의들이 환자가 걷는 모습만 보고도 환자 상태를 파악했듯이, 환자들의 진료도 문을 열고 모니터 사이에 숨어 있는 의사를 찾아 짝사랑의 방식으로 눈 맞추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때 담당의사가 허둥대면서 컴퓨터에 검사 결과나 뒤적거리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 얼마나 실망스러운가? 맛집으로 이름난 식당에 정작 맛이 없는 이유는, 음식 외에 신경 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허름하지만 주인이 직접 요리하는 조촐한 식당에서 뜻밖의 감동을 받았던 기억처럼, 현대의 명의는 나를 한번 더 봐주는 이름 없고 한가한 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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