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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Apr 08. 2022

25 행복감이 가장 큰 직업 주방장

호랑이 주방장이 산다


커리어블리스닷컴 (CareerBliss.com)에 따르면 가장 행복감이 큰 세 가지 직무는 학교 교장, 대출심사 담당자, 그리고 주방장이라고 한다. 각 직무는 고유한 관계성과 자율성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는 한편 유능성의 느낌도 상당히 크다.

- 책 <언스크립티드> 중




Ep 1. 가장 진땀 빼는 날


료칸의 저녁식사는 계절의 식재료를 사용해 10코스가 넘는 메뉴가 한 달마다 모두 바뀐다. 그래서 매달 초가 되면 가장 하기 싫은 업무가 외국어 메뉴표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가장 긴장되는 날이기도 하다.



엑셀 표에 각 재료들을 입력해 놓지만, 매달 매번 새로운 단어들이 등장한다. 특히나 메뉴는 조금 더 있어 보이도록 히라가나가 아닌 한자로 적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들도 읽기 어려워 물어보곤 한다.



번역기에 돌리면 큰일이다. 전에 조선족인 동료가 중국어를 한국어로 변형해서 돌렸다가 한국어 메뉴를 이상하게 적어서 놀란 적이 있다. 그리고 풀떼기 같은 메뉴는 적지 않아, 맡기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에도, 어느 외국에도 없을 법한 식재료들이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번역되지 않는 게 꽤 많다. 하지만 계속 찾다 보면 나오는 것도 있어서 쉽게 포기할 순 없다. 풀떼기 하나 찾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도 한다.



식재료들과 요리 방법 등을 나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있는 반면에, 문제는 따로 있다.



주방장이 메뉴가 바뀌는 날 아침까지 고민하는 것이다.



지배인 격인 후지타상이 일본어로 메뉴표를 만들면, 나는 한국어와 영어 메뉴표를 만든다. 보통 오후 출근해서 체크인도 도와야 하는데, 그날은 뭔지 모를 한자들과 씨름하느라 진땀을 흘리곤 한다. 일본인 직원들에게 읽는 방법을 먼저 물어 보고 야후, 구글, 네이버에 의존한다.




메뉴가 바뀌는 날은 시간이 모자라 패닉 상태가 될 때가 종종 있다. 변경되기 며칠 전에 대략적인 구성이라도 좀 보여달라고 해서 받은 적이 있는데, 악필이라 알아보기 힘들어 질문이 더 많아졌다.




그 날은 저녁 준비 전에 레스토랑 직원들이 주방에 모여서 주방장에게 요리 설명을 듣는다.


'이건 이렇게 준비를 해 주고, 이건 이런 식으로 드시도록 안내하세요.'


요리가 아니라 아트다...


나도 체크인이 붐비지 않는 이상, 참석해서 설명을 들으려고 한다. 가끔 서빙할 때 퍼포먼스가 있다거나 먹는 방식이 복잡할 때는,


'행아, 외국 손님들을 위해서 메뉴표에 안내사항을 기입해 주세요.'


풀떼기 한 장 놓은 것부터 하나하나 너무 정성스럽다. 주방장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메뉴를 완성하기까지의 고민이 뚝뚝 묻어난다.


그러니, 외국어 메뉴표라고 해서 간단하게 만들 수 없다.



일본어만 있는 타 료칸의 메뉴표



이 많은 사람들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만들어 놓은 요리를 잘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요리를 먹는 손님들에게도 그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이해를 도와야 한다. '당신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했어요' 라고 대접받는 기분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건 내 스스로 얹은, 어깨의 무게이다.





Ep 2. 과도기


주방에는 호랑이 주방장이 산다.


나와는 크게 부딪힐 일이 없었지만 대체로 지배인 격인 후지타상한테 화를 많이 낸다. 고래고래.


내가 당하는 건 아니지만 옆에서 보고 있자니, 심기가 불편하다. 외국인 손님들이 많아지자, 한껏 더 예민해진 주방장이다. 후지타상을 통해서 체크인 때


"알레르기 있는지 체크 안 했어!? 당일에는 변경 불가능해!! 당일 식사 추가는 안돼!!!"


라는 식의 통보가 들어온다.




예약사이트를 통해서 오는 외국인 손님들은 식사 포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타 예약 사이트에서 'Half Board 조석식 포함' 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식사가 포함되었는 줄 알고 한껏 기대하고 왔다가 체크인할 때 실망, 혹은 역정을 내는 손님들이 점점 늘어간다. 화를 낼 때는 예약한 부킹사이트에 연락을 해 보시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 사장님은 업무를 지시했다.


"식사가 포함 안된 외국인 고객들에게 식사가 포함 안됐다는 걸 이메일 혹은 전화로 미리 공지해 줘. 그리고 추가할지 여부도 물어보고. 알레르기도 미리 확인해야 해"



아아악.

지금도 일이 많은데, 이 많은 외국인들한테 다 연락하라고요?? 속에서 화가 났다.




하지만 매뉴얼을 만드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이메일에 '복사 붙여넣기'하니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었다. 혹은 시차에 맞춰서 전화통화한다. 식사 추가할 시에는 꼭 확인 메일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식사는 물론, 알레르기 확인/도착시간/셔틀버스 이용방법 등, 미리 손님들과 이메일로 핑퐁 소통하는 재미도 있다.



체크인 전에 손님과 라포가 형성되어, 본인 나라의 선물을 챙겨오는 경우도 있다.





호랑이 주방장은 여전히 화는 내고 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그리고 융통성 있게 연락이 닿지 않는 손님을 위해 당일 추가 여유분을 조금 준비하게 되었다. 당일 저녁식사 추가는 10만 원/1인 이 넘지만, 손님들은 요리를 기대하고 오기 때문에 주문한다. 재료가 부족하면 부족했지, 남지는 않는다.



주방장에게 추가 여유분도 졸랐다가 안되면, 주변에 가능한 가이세키 코스 요리집을 알아보고는 한다.



체크인할 때 손님과 주방장 사이에 끼여서 소란스러웠던 일들도 점차 줄어들며, 이내 사라지게 되었다.







밖에서 보면

큰 소리 벅벅 지르는 미운 주방장이었다.



하지만 주방의 모든 것, 그리고 요리가 제공되는 레스토랑 공간까지 모두를 신경 써야 하는 주방장이란 책임의 무게가 같이 일을 하면 할수록 +100g 씩 무겁게 체감한다.



그래서 나는 외국 손님들이 '혀가 호강했다' '제일 맛있는 요리다' 등등의 후기를 볼 때면 주방장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면 호랑이 주방장의 입가에 미소가 띤 옆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히힛.



호랑이 주방장이 사는 주방 이야기 시리즈 끄ㅡ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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