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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7년 넘은 숙원사업

창고 정리

by 지혜


엄마가 드디어 창고를 비워내셨다.






유명한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는 어렸을 때, 가족들의 물건들을 마음대로 정리하고 버렸다고 한다. 가족들이 어디 갔냐고 물으면 모른 척을 했다. 이후 정리 금지령이 내려지고 깨달은 바가 크다고 한다.




나도 처음에 정리를 시작하면서 어질러져있는 가족들의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내 눈에 비울만한 물건이면 "이거 안 비워요?" 하고 묻기 일쑤였다. 꼭 비우라는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엄마는 점점 예민해졌다. "왜 자꾸 너는 버리려고 해!!!" 느낌표 다섯 개 포함해서, 언성을 높이신다.



가끔은 나도 모르는 물건을 범인으로 모는 상황까지 왔다. 내가 “본 적 없어요.”라고 말하면 엄마는 저번까지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다. 네가 버린 거 아니냐 라는 말까지 들으니, 황당하기도 하고 누명을 벗고 싶어서 물건을 찾기 시작한다. 항상 찾은 물건은 엄마가 쇼핑백에 넣어두거나 다른 곳에 놓고 잊었던 것이다.



곤 마리가 나중에 깨달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소중한 물건일 수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엄마, 내 말 좀 들어주세요!!!!!

그러니까 정리하자구요…)






대부분의 공간에 손을 댔어도 내가 손을 못 뻗치는 곳이 한 군데가 있었다. 바로 베란다 오른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잡동사니 창고이다. 큰 작업이라 엄마의 마음이 준비가 되어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7년 넘게 묵혀있던 베란다 창고를 정리하시는 게 아닌가. 매번 '치워야지 치워야지' 말만 하시던 엄마가 힘을 내신 거다.



"갑자기 오늘 왜 정리하세요?"

라는 나의 질문에


"다 타이밍이 있는 거야."라고 대답하신다.



거실 앞 베란다에 낡은 물건들이 척척 쌓이더니, 이제는 거실 안까지 점령했다.



‘아, 거실에 들어온 물건들은 내가 봐야 할 추억의 물건들이구나.’



끼약. 박스를 열어보니 나의 20살 때 연애 사진과 군대에서 온 편지가 떡하니 보인다.



언니가 시집가고 나도 한국에 없으니, 엄마는 우리의 추억 물건들을 박스에 고이 넣어두셨던 것이다.



볼 필요도 없고 다 비워야겠다! (사실은 위에 있던 몇 개 읽다가 오글 거려서 못 보겠더라.)





아기때 사진부터 차마 앨범에 다 들어가지 못한, 선택받지 못한 사진들이 무수하게 많다. 디지털화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예전에는 필름과 현상된 사진들을 모두 지니고 있었어야 했으니, 문명의 발달에 감사하다.



하지만 이만큼 데이터 용량도 과부하가 되고 있는 건 아닐지 비 물리적인 데이터도 점검이 필요하겠다.



사진은 20장 정도 남기고 모두 버렸다. 특히나 추억 사진은 버릴 것을 생각하면 안된다. 무엇을 남길 것인지가 중요하다.



가족들의 사진들은 각자가 판단하도록 가족별로 분류해 두었다. 언니에게 언제 집에 와서 정리하라고 카톡을 보냈다.



사진들을 보니, 어렸을 때 무뚝뚝한 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빠는 나를 많이 안아주셨구나~ 아빠께도 메시지를 보냈다.



* 제부도 뱃길 열리는 것 아님 주의 *
아빠의 사랑




낚시, 캠핑용품, 아빠가 만든 썰매 등의 낡은 물건들이 많았다. 몇 십년은 더 된 것들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빠의 사랑도 많이 발견되었다.




봉투 50리터 두 봉지를 가득 채우고 나머지는 동네 아주머니가 고물상 할머니께 가져다 드릴 물건들이 베란다에 한가득이다.




엄마의 숙원 사업이었던 창고를 정리한 틈을 타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기 안방 장롱에 통장들도 다 비우는 게 어때요?"


엄마는 바로,


"응, 그거랑 저기 안방 박스에 담긴 것들도 해야 하는데."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그 박스라 함은 내가 처음 부모님 물건을 정리할 때 비움 실랑이를 했던 상자다. 친외할머니의 휴대폰, 수첩 등의 유품들과 아빠의 추억 물품, 사용하지 않는 잡다한 물건들을 하나도 비우시지 않아서, 한 군데에 모아뒀다.



나는 말이 바뀔 새라, 얼른 안방에 들어가서 박스들을 번쩍 들고 거실로 나왔다.


엄마가 한 마디 더 하셨다.

"저기 책장 위에도 있는데."


세상에나, 엄마가 정말 단단히 마음을 먹으신 모양이다. 세상 기쁘다.



옛날 통장들





곤 마리가 가족들에게 정리 금지령을 받고 자신 방에 들어가자, 정리가 안된 부분들이 보였다고 한다. 사실은 자신의 공간이 정리가 안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물건에 손을 댄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해 나가는 모습을 보자 친 오빠부터 점차 정리를 시작해 나갔다고 한다.



정리도 나비효과가 있는가 보다. 우리 집에도 작은 변화가 시작됐다.




창고에서 나온 폐가전들은 무상 방문수거를 신청하고, 새 제품은 당근에 올렸다.



이제 폐가구 신청해서 붙이고 나머지는 50리터 봉투 한 장만 더 사서 넣으면 끝!




저녁에 간단하게 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고생하신 엄마가 ‘힘이 없으니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하셔서, 바로 지코바 치킨을 주문했다.


엄마 왈


"딸이 도와줬는데 내가 치킨 사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정리를 시작한 엄마를 보는 제 기분이 좋아요! 이제 옛 통장, 창고 물건들을 비운 자리에 좋은 기운이 들어올 거예요!"



비운 곳에 좋은 에너지가 들어온다.




유튜브> 정리 후 ‘요리가 전진주’ 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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