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나요 #17

과거

by Cruel Ella

맥주 500cc 두 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살이 조금 오른 것 같기도 하고 머리를 길게 길러 내가 알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더 또렷해진 눈매와 굳게 다문 입에 무게가 실려있다. 그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없지만 외모는 여전히 수수하고, 까무잡잡한 피부와 생기 있고 도톰한 입술은 아직도 매력을 뿜어낸다.


나와 그렇게 헤어진 후 여럿 남자를 만났었겠지. 그녀의 환한 미소에 반한 남자도 있었을 거고, 계산적이지 않은 순수함에 빠진 남자도 있었을 거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서 늘 평안함을 자아내던 그녀다. 같이 있으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말이 없고 순종적인 편이라 싸울 일도 별로 없다. 기분 따라 태도가 변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연애에는 재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 나에게 온다면 최고의 여자임이 틀림없다.


"널 보내고 많이 후회했어."


진심을 담아 말을 전한다. 유나와 함께 있던 장면을 보게 한 내 잘못이 가장 크다. 지금은 실수라고 생각하지만 그때에는 그 선택이 필수였다. 유나는 모든 걸 가지고 있던 여자였다. 그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들면 세상은 전부 내 것이 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러다가 가지고 있던 막걸리를 잔에 따른다.


"결국 2년 만에 가진걸 모두 잃었어. 교도소에서 2년 살고 나와 지방에서 겨우 사업 하나 시작했는데..."


눈물이 맺힌다. 그때를 생각하면 모든 게 후회뿐이다. 유나에게 홀려 지윤이를 버렸다. 도망가는 지윤이를 쫓아가지 않은 건 내가 그녀를 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도 잃었다. 아버지께서 일궈 놓으신 모든 재산과 집을 내가 망쳐놓았다. 같이 사업을 시작했던 유나 남편이라는 작자는 경기가 안 좋아지고 사업이 잘 되지 않자 아버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사업 초기 자금을 아버지께서 마련해주신 것이어서 자금이 부족할 때마다 타깃이 되곤 했다. 내연남으로 날 옆에 붙여 놓고 장난질하던 유나는 협박한답시고 사람을 불러 아버지 집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아버지도 어머니와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난 그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했다. 용서가 되지 않는다. 나 스스로에게.






그녀는 막걸리가 담긴 잔을 내 앞에 놓는다. 오랜만에 마주한 막걸리다. 하얗고 뽀얀 액체가 잔에 가득 담겼다. 흐느낄 때마다 흔들리는 진동으로 막걸리에 파동이 인다. 그리고 이내 막걸리 잔 안으로 나의 눈물도 한 방울 두 방울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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