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나요 #16

재회

by Cruel Ella

마시지도 않을 막걸리를 한 병 산다. 이제 퇴근길 습관 같은 일이다. 마치 그를 향한 그리움이 묻은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회사에서 집까지 거리는 10분. 그 짧은 거리를 걷다 보면 4개의 편의점을 지난다. 요새 편의점이 부쩍 많이 생겼다. 슈퍼는 없어지고 정찰제인 편의점에서 물건을 산다. 점원은 기계 같은 손놀림으로 카드를 받아 계산을 하고, 손님의 얼굴 따위는 보지도 않는다. 봉지는 50원. 검은 봉지가 아니라서 좋지만 역시 아까운 돈이다. 편의점 로고가 찍힌 하얀 봉지 안에 막걸리 한 병만 담겼다. 무겁지도 않은 봉지를 살짝살짝 흔들며 걷는다.


"지윤아."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구나. 그를 잊겠다고 다짐했는데 요새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막걸리 산 걸 후회한다. 이런 습관은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내 오른손에 들린 봉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돌아가서 환불할까? 잠깐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춘다.


"너, 막걸리 안 마시잖아."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환청이 아니다. 그 사람 목소리다. 본능적으로 소리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린다. 곱슬머리를 약간 기른 채 검은 모자를 눌러쓴 그가 보인다. 정확히 눈썹과 귀 사이에 화상 자국이 있다. 그가 확실하다. 나보다 훨씬 먼저 퇴근했을 텐데 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걸어온다. 첫 만남 때 느꼈던 설렘보다 더 큰 심장의 요동을 느낀다. 이건 설렘이 아니다. 다른 말로 표현이 어려운 두근거림이다.


난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무슨 말로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문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고개를 다시 돌려 도망갈 수도 없다. 과거의 나와는 다른 나를 발견한다. 지금 나는 이 상황을 정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눈물도 나지 않는다. 15년 전과는 다르다.


다가오는 그에게서 땀 냄새가 풍겨온다. 익숙한 체취다. 어쩌면 난, 그와 함께 했던 공기와 이 냄새를 그리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근처 호프집의 구석진 자리. 그와 마주 보고 앉는다.


그를 바라본다. 가까이에서 보니 내가 기억하는 예전 모습보다 살이 많이 빠져서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 있다. 그래서인지 180cm인 키는 더 커 보인다. 얼굴은 많이 상했고 손에는 굳은살이 박였다. 그는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 손이 늘 부드러웠었다. 그 손으로 내 몸의 여기저기를 만져주면 어느 마사지보다 더한 쾌감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고생이 박힌 거친 손은 예전의 그의 손과 닮아있지 않다. 곱슬머리는 여전히 아름다운 웨이브를 선보이고 있다. 내가 좋아했던 머리카락이다. 은은한 자연 갈색 머리카락은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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