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명함
유나는 나를 보며 방긋 웃는다. 난 날 향해 웃는 여자에게 약하단 결론이 그때 생겼다. 유나도 그렇고, 지윤이도 그랬다. 나를 보며 방긋 웃는 여자에게 난 무장해제가 된다. 어쩌면 그건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만이야, 많이 변했네."
캐주얼 복에서 양복으로, 운동화에서 구두로 그리고 안경에서 렌즈로 바뀌었다. 담배는 끊었고, 술은 여전히 막걸리만 찾는다. 많이 변했다란 유나의 말에는 나의 외모뿐만 아니라 분위기에서도 느껴졌을 무언가를 말한다. 대기업에 다닌다는 내 소식을 동창 놈에게 얻어 듣고는 냉큼 연락해 왔을 것이다. 내 예상은 그렇다. 유나는 남자가 알지 못하는 여러 직감을 가지고 있고 그건 꽤나 정확하다.
"나 결혼했어, 오빠."
통보다. 전해주는 소식 안에 나의 선택지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대학 과동창회에서도 유나의 결혼 소식은 들은 바가 없다. 아직 결혼하기엔 조금 이른 나이이기도 하고, 남자 동창 중에는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초년생들이 전부인 데다 여자 동창들은 다들 어느 정도 커리어가 있어서 남자를 골라간단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축하해, 몰랐네."
진심으로 전한 축하인 것인가, 아니면 아쉬운 인사치레 소리일 뿐인가. 난 아름다운 유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앉아있는지 순간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건 어떤 남자든 누구나 그럴 것이다.
"연애는 하고?"
지윤이가 생각난다. 그녀는 순수하고 계산적이지 않아서 너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곧 아버지께 인사도 시킬 거라며 한두 마디 던질 참이었다. 그런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난 입을 다물고 가만히 명령만 기다리는 대형견처럼 앉아 있다. 유나는 여유롭게 웃는다. 그리고는 가방을 뒤적이며 익숙한 듯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낸다.
"내 명함이야, 연락 못 받을 시간 같은 건 없어. 편할 때 언제든 전화해."
이건 무슨 볼일인가. 그녀의 명함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천천히 읽어 나간다. 그녀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 것임이 틀림없다. 서울 한복판 그것도 큰 기업들이 줄지어 있는 곳에 자리한 고급 와인바다. 상사들이 손님 접대한다며 나보고 예약해두라던 목록 중 한 곳이다.
난 그 명함을 지갑 깊숙이 넣어둔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들고 가슴 안쪽 주머니에 넣는다. 유나의 핸드폰 번호는 저장해 두지 않는다. 우리의 뒷번호는 이미 같다. 이미 외우로도 남을 번호인 것이다. 난 불현듯 유나의 번호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름다운 것에 두 번 홀린다. 한 번의 실수는 잊히는 게 아니라 원래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나를 설득하기 위한 스스로의 핑계일 뿐인걸 두 번째 실수 후에 깨닫는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사람은 그렇다. 잃어봐야 귀한 걸 알고, 깨져봐야 본연의 것을 찾는다. 어쩌면 지윤이게 난 이미 자격 없는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지윤이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지윤이를 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