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나요 #13

실수의 잔해

by Cruel Ella

'유나'라는 여자를 만나고 온 이후, 난 부쩍 말이 없어졌다. 생각이 많아진 것이 그렇게 표현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는 변한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여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그는 아무래도 그녀의 존재를 잊은 듯해 보인다. 내가 괜히 말을 꺼냈다가는 우리 사이가 흔들리게 되면 그게 그 여자의 목적일 수도 있겠단 결론이 났다. 그래서 나는 모른 척한다.


그의 아이.


그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그 여자가 아이를 일방적으로 지운 걸까. 생각해보면 자리잡지 않은 젊은 남녀에게 아이란 존재는 너무 버겁다. 그저 쉽게 생각하고 실수라 여기며 존재를 지운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의 아이를 가졌던 여자는 내게 넘지 못할 커다란 벽처럼 느껴진다. 그들만의 세상이 있었겠지. 그 속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추억이 있을 것이고, 아이를 가질 만큼 서로 사랑도 했으리라. 3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같은 캠퍼스에서 손잡고 거닐며 밥을 같이 먹고 수업도 같이 들었겠지. 그 시간과 비교했을 때 내가 이 사람과 함께 한 1년 남짓의 시간은 너무 초라하다.


이제 막 자리 잡고 무언가를 일궈 나갈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좋아했는데, 우리는 이제 시작인데. 그는 그의 아버님께 나를 인사시키고 싶다고 했었다. 혼자 살고 계시다던 아버님과 자주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사연이 있겠지. 어머님이 안 계시다고 하는 걸 보니 남자끼리는 그런 사소한 연락 따위 잘 신경 쓰지 않는 편일 거다. 인사를 드리러 가자는 소리에 혼자 들떠 있었다. 나도 어엿한 직장인이고, 이 사람과 1년 이상 잘 사귀고 있다는 것만으로 난 그와 함께라면 무서울 게 없었다.


그 여자만 아니면.


왜 날 만나자고 했을까.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내게 연락을 했을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했던 걸까. 자기보다 이쁘거나 잘났으면 진작 그를 포기했으려나. 난 누구와 비교해도 긴장될 사람이 아니다. 그게 지금 가장 후회되는 일 중 하나다. 열심히 산 것 같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를 빼면 내 인생에는 귀한 것 하나 없는 먼지 같아서 없어져도 모를 사람인 거다.






그 여자가 찾아왔었단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나의 실수였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하고 공유하며 같이 헤쳐나갔어야 옳았다. 숨기는 것 자체만으로 신뢰는 무너진다. 어떤 진실이든 거짓이든 비밀이 생기면 상대는 뒤로 물러나게 되어있다.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와 헤어진 이후 남자가 없진 않았다. 그렇다고 더 발전적인 연애를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숨고, 입을 다물고, 못 본 척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의 주 특기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연애를 길게 할 수 없었다. 하나같이 나에게 말했다. 도대체 너란 애는 무슨 생각으로 자기를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사랑은 하는 거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답답했을 것이다. 표현을 하지 않고 도망만 다니는 나를 곁에서 버텨줄 수 있는 남자는 없었다.


그건 내 잘못 같아 보이지만 순전히 그 사람 탓이다. 그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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