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억하나요 #12

또 다른 시작

by Cruel Ella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오후 3시. 유 반장님이 나를 불러 세운다.


"어이~ 김석우 씨."


땀에 젖은 나는 유 반장님 쪽으로 눈을 돌린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유 반장님이 사무실 홍 실장님에게 나를 물류 센터 관리직으로 추천을 했다고 한다.


"자네, 일한 지 반년 넘었나?"


유 반장님은 물류 센터 일을 차근차근 정리 중이시다. 그만두실 생각이 있으신 모양이다. 나이도 많이 드셔서 일이 좀 버겁다고 했었다.


"석우 씨 나이도 그렇고, 어디 한 곳에 정착을 해서 돈을 벌어야 생활이 안정될 거 아녀~."


내가 위태로워 보였던 걸까. 꾀부리지 않고, 어디 아픈 곳도 없어 보이고 무엇보다 말수가 없는 것이 더 믿음이 간다고 한다.


"어디서 일을 하다 왔는지는 모르겠지만은~ 물류 센터 돌아가는 것도 좀 아는 눈치고, 물건을 적제 할 때의 요 령도 있고. 일을 안 해본 애들과는 다른 손놀림이여. 전에 이런 일 많이 해본겨?


대기업에서는 영업부에서 일을 했었다. 지역 물류센터부터 마케팅 부서까지 여러 경험이 있었던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인데,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사업을 했던 경력이 제일 크게 작용한 듯싶다. 그러나 과거 일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래야만 했던 이유 모두 들춰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말을 더 아낄 수밖에 없었다.


"다음 주에 이력서랑 사진이랑 해서 좀 준비해가지고 와봐. 통장 사본도 챙겨 오고."


특별한 제안이고, 너무 기다렸던 호의지만 지금 지윤이를 알아본 이상 난 여기에 더 이상 있을 면목이 없다. 그러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런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내 처지가 너무 절박하다. 다시 새벽부터 인력 시장을 드나들 생각을 하니 아찔하지만 그 편이 심적으로는 더 나을 거란 계산도 했다. 하지만 정직원이라니. 나만 입을 다물고 지윤이도 이대로 나를 아는 체 안 한다면 이쪽 회사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이성적인 판단보다 감정적인 휩쓸림에 잘못된 선택을 했던 과거가 있다. 그때의 나는 도대체 무엇을 붙들고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창피해서 말도 못 꺼낼 이야기다. 다들 그런 과거쯤 하나씩 있다고는 하지만 난 나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다시 움직일 때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만큼 벌을 받는 거라 생각하면서도 분해서 잠이 안 오는 날도 많았다.


전 여자 친구인 유나가 돌아온 건 대기업 합격 후 10개월 만이다. 갑작스러운 연락이었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친근히 나를 불렀다.


"오빠~ 나 유나야, 지금 통화되지?"


그날 유나를 만나는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 자리에 나갔으면 안 되는 거였다. 쓰라린 이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도 스스럼없이 만날 사이라 생각한 걸까. 용건도 모르고 나간 그 자리엔 화려함을 휘감은 유나가 앉아 있었다. 별로 변한 것 없어 보이는데도 더 빛이 났다. 일방적인 통보를 일삼는, 임신이란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유나는 더 빛나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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