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사무실 책상 앞.
흐트러진 영수증을 한데 모으고 날짜별로 정리한다. 품목별로 분류하고 컴퓨터에 정산 기록을 남긴다. 요새 계속 저녁마다 막걸리를 마신다. 특히 어제 마셨던 막걸리는 숙취에 아주 안 좋았던 모양이다. 속이 느글거려서 아침도 못 먹고 좋아하는 커피도 못 마시고 있다. 박 대리는 이것마저 놓칠세라 히죽거리며 날 향해 어김없이 비아냥 거린다.
"어제 누구랑 술 마셨길래 몰골이 왜 이 모양이야? 아주 끝까~지 달렸나 봐?"
선을 넘을랑 말랑 아주 간당간당하다.
"나이 서른일곱이면 술 마시고 할 거 다 할 나이지. 안 그래?"
한 마디만 더 하면 주먹을 날리려던 참이다. 그동안 참으며 지낸 세월에 비하면 주먹 한방은 상대를 너무 배려한 체벌이다. 예전의 나 같으면 대꾸할 생각도 못하고 눈도 못 마주쳤을 텐데 웬일인지 오늘은 한마디 거하게 발사됐다.
"욕정을 입으로 풀면 좀 개운해요?"
주먹보다 입이 먼저 나선다. 사무실 사람들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미어캣처럼 다들 나를 보고 시선을 고정시킨다. 나도 나다운 말이 아니어서 좀 놀랐지만, 사람들 반응이 괜찮기에 용기를 더 내보기로 한다.
"입 좀 다물고 일 좀 합시다. 거 되게 시끄럽네."
후련하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나중에 용기가 생긴 건 무엇 때문인지 설명하기 힘들지만 난 지난 추억을 생각하고 후회하다가 지금의 나를 드러냈다. 이후에 오는 정적과 힐끔 거리는 눈초리는 내가 감당해야 할 또 다른 불편함일 수 있어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방 먹인 건 참 잘한 일이다.
"언니, 오늘 완전 대~박."
이 아인 처음부터 끝까지 표준말을 잘 쓰지 못한다.
"개 후련 해. 짱 멋졌어요, 언니."
점심 먹는 내내 시끄럽다. 내 할 말을 한 것인데 이렇게 큰 이슈가 된다. 그동안 못한 것까지 하려면 아직 많이 남았다. 박 대리는 나보다 한참 어리다.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여직원은 그저 장난감 수준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다. 그런 놈에게 한마디 거하게 먹였을 때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진작 그랬어도 괜찮았었다는 암묵적인 신호일지 모른다. 근무 연차 수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난 박 대리보다 못한 것이 없었는데 그저 여자란 이유와 허드렛일을 한다는 능력 차이로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때, 이런 용기로 그를 잡았으면 내 인생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을까. 용기가 없어서 그대로 도망친 나를 스스로 자책하며 살았다. 어쩌면 그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좀 잡아달라고, 내가 여기서 도망갈 수 있게 손을 끌어달라고 애원하는 눈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의 얼굴도 그녀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흐릿해져 가는 초점에 눈물이 맺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뒤돌아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