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담긴 잔
그가 운다. 고개를 숙인 그에게서 떨어지는 눈물방울만 보인다. 눈물은 방울방울 막걸리 잔 안으로 스며든다. 떨어지는 나쁜 과거를 모두 흡수해서 없애버리려는 것처럼. 마시면 안 되는 독약이 되어가는 듯하다.
담담하게 말하기 힘든 과거다. 알아듣기 어렵고 상상하기 힘든 얘기들 뿐이다. 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흘려버린다. 그는 유나라는 여자를 선택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아버지를 잃고 나를 버린 죄,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금에서야 내 앞에 모습을 보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듣고 보니 그동안 그에게는 쉬운 선택이 하나도 없었다. 내 예상대로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에 홀려 돈을 좇았다고 말한다. 나와 사귀던 그때에도 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그 여자를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내 멋대로 짐작했다. 그리고 묻지 않았다. 알게 되면 내가 더 상처 받을 것 같아서 무서웠다. 묻지 않은 건 그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도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에게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알아, 어쩔 수 없이 끌렸던 거잖아."
사실이다. 그는 그 여자를 만난 후 나에게서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나고 있었다.
"내가 당신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도망친 거야."
그날 그의 집은 일부러 보란 듯이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잔인한 장면을 보게 했다. 그때, 내가 그의 손을 잡고 나왔으면 그는 따라 나와줬을까. 이건 아니라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정신을 차렸을까. 그 여자는 발가벗은 모습마저 너무 아름다웠다. 나에겐 돈도 없고 정보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그의 앞길에 도움이 될만한 게 하나도 없었는데 그 여자는 그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둘 사이에 내 자리는 없었다. 난 그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여자임을 확인했고, 결국 비참하게 돌아섰다.
그를 두고 도망간 선택을 한건 나였다. 어쩌면 그의 잘못이 아니라 내 선택에 따라 산 인생이다. 원망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날 탓하며 사는 것 또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자신하며 그를 몰아세운 것도 나다. 난 내 멋대로 그를 만들고 있었다. 지금 그가 내게 오지 않았으면 깨닫지 못한 중요한 것을 15년 후에야 알게 된다.
그가 마시지 못한 막걸리는 내가 마셔버린다. 그의 눈물이 담긴 시큼함과 어울리지 않는 탄산이 목구멍을 타고 아프게 내려간다. 그리고 새로 한잔 더 따라서 그의 앞에 두었다. 이제 새로운 것에 좋은 것만 채우면 된다. 나쁜 추억과 아픈 과거는 내가 삼켜버리고, 그는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