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실 버블 밖, 파스텔톤 발렌시아

by 연주신쥬디

스페인 발렌시아라는 낯선 도시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도 대학원 선택지는 많았지만 굳이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으로 향했다.

버클리(Berklee)에서 학사를 마쳤으니 같은 이름의 대학원을 가는 게 편할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곳으로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보스턴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왠지 모를 답답함이 있었다. 학교에도 한국인이 많았고 한인 교회까지 다니다 보니, 미국 '보스턴'이 아니라 '보수동'에 사는 기분이랄까? 더 넓고 새로운 곳에 발을 딛고 싶었다. (실제로 보스턴 한인들은 보수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며 잠시 지내보고 싶었다.


3개월 반 동안의 알래스카 크루즈를 마치고 드디어 2015년 8월 말, 발렌시아에 혼자 도착했다.

우리 학교는 발렌시아의 랜드마크인 City of Arts and Sciences(Ciudades de les Artes y las Ciencias)라는 경이로운 건축 단지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매일 햇살 아래 반짝이는 야자수를 보며 등하교를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 호르몬이 솟구쳤다, 새로운 친구들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배우는 일상은 막대한 과제와 연습량도 기꺼이 견디게 할 만큼 충분히 가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캠퍼스 내에서의 생활이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발렌시아라는 도시를 깊게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주말에도 녹음실, 합주실, 연습실로 출근하기 바빠 '스페인에서의 삶'보다는 여전히 '버클리 대학원에서의 삶'에 갇혀 있었다. 학기 초 오리엔테이션 때 학과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Don't stay in the Berklee bubble. Go out and explore Valencia! Enjoy what this beautiful city offers. Get out of the bubble!"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강렬한 조언이었건만, 막상 학기가 시작되니 나는 학생의 본분에만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그러던 11월의 어느 날, 연습실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열심히 뚱땅거리다 문득 이대로 피아노만 치다 졸업하면 크게 후회할 것 같다는 직감이 스쳤다. 'Get out of the bubble'을 실현해야 했다.

멀리 가지는 않았다. 대신 매일 스치던 지나던 학교 앞 풍경을 깊게 appreciate 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림은 흑백이지만,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예쁜 색깔로 상상해 보시길. :)


건축 단지 내의 독특한 건물들 중 그날 유난히 내 길을 사로잡은 건, 투명한 수면 위로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룬 두 건물이었다. 고래처럼 생긴 과학 박물관과 반구의 형태의 iMAX 영화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하늘은 분홍빛과 하늘색이 수채화처럼 섞여 물 위로 번지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펜을 움직이고 있으니, 지나가던 친구들이 쥬디 여기서 뭐 하냐며 기웃거리기도 했다. 연습실 버블의 답답한 공기를 벗어나 발렌시아의 파스텔톤 공기를 마시며 그린 그림. 나의 발렌시아 첫 스케치는 그렇게 11월의 어느 오후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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