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크루즈에서 일을 시작한 2015년, 하루하루가 현실 같지 않은 신기함의 연속이었다. 미국에 살며 다양한 문화와 사람에 익숙해졌다고 자부했건만, 크루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매일 연주해야 하는 생소한 음악들, 2000명 넘는 사람들 중에 나는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묘한 고립감과 해방감, 층마다 넘쳐나는 엔터테인먼트와 음식, 그걸 즐기는 풍만한 체구의 승객들, 수시로 느껴지는 배의 출렁임까지, 이 모든 걸 품은 거대한 호텔이 바다 한복판을 가르고 있다는 게 매 순간 신기했다.
그래서, 여행 스케치북에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결의 그림을 남기고 싶었다.
선을 여러 번 겹쳐서 정교함을 살리는 평소의 스타일 대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조금 더 단순하고 귀여운 그림체로 기록해보고 싶었다.
이 그림에는 당시 내가 경험한 Zaandam의 실제 구조를 많이 반영했다.
가장 위층에는 Crow's Nest라는 파티 라운지를, 그 아래엔 온갖 산해진미가 넘쳐나던 뷔페를 그렸다.
동그란 창문(Port Hole)이 늘어선 객실 층도 잊지 않았다.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승객들은 내 눈에는 한없이 여유로운 부자들처럼 보였기에, 돈주머니도 슬그머니 그렸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실 미국에서 크루즈는 그다지 비싼 휴가는 아니다.) 복도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안내견과 Emotional Support Animals도 그림 속 한자리를 차지했다.
Zaandam은 4층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메인 공연장, 주얼리샵, 카지노, 사진관, 아트 갤러리 등 나를 포함한 동료들의 일터였다.
그리고 그 화려함 아래, 승객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곳, "A deck"은 크루들의 숙박시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답답한 공간이었다.
분명 단순하게 그리고 싶었는데, 완성된 그림을 보니 결국 크루즈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꾹꾹 눌러 담고 말았다.
문득 며칠 전 안경점에서의 대화가 생각난다. 시력 검사를 받던 중, 검안사께서 "고객님은 뭘 하셔도 대충 하지는 못하시겠네요"라고 하셨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고 여쭈니, 사람마다 편안함을 느끼는 시력의 도수가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조금 덜 또렷하더라도 부드러운 시야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고, 최대한 정확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상태에서 비로소 안정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물체가 또렷해질수록 시야가 좁아지거나 왜곡이 생길 수도 있지만 내게는 그 또렷함이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거라고 하셨다.
검안사님 말씀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난 또렷하고 명확한 걸 좋아하고 '대충'이라는 기준이 남들보다 좀 타이트한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그림도 사실적인걸 또렷하게 그리고 말았다.
단순하면서도 이야기가 잘 담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남긴 흔적들이야말로 어쩌면 내가 여행을 추억하는 가장 나다운 방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