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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신쥬디 Mar 13. 2024

파란 눈을 처음 본 일곱 살 그날

Challenge라는 인생 도미노의 첫 조각

초등학교 2학년, 만 일곱 살 꼬마였던 나는 미국 초등학교에 한 학기 다닐 예정으로 여름방학 때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 할머니댁은 참 좋았다. 문밖에 바로 잔디가 있고 토끼랑 다람쥐도 볼 수 있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있는 알록달록 놀이터도 여름에 엉덩이 데일만큼 뜨거워지는 한국의 쇠 미끄럼틀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모가 만들어주는 Jell-O도 너무 맛있었다. 미국에서 처음 보내는 여름방학은 즐거웠다. 하지만 공포의 개학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 초등학교에 다녀야 한다니, 난 죽어도 싫다고 울고 불고 떼를 썼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한국 학교의 일상을 이루는 것들은 이러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교실, 짓궂은 남자애들과 매 들고 혼내는 선생님, 시끄러운 수업시간 동안 쉴 틈 없이 땡땡땡!!!!! 거리는 교탁 위의 금색 종, 분필 가루로 뿌예지는 녹색 칠판 주변, 발로 페달을 밟아야 소리가 나는 풍금 (나는 키가 작아 페달에 발이 닿지 않아 옆에서 친구가 페달을 밟아줘야 건반을 칠 수 있었던...) 온갖 낙서로 가득한 지저분한 나무 책걸상, 바닥에서 공기놀이를 하면 손에 가시가 박히는 마룻바닥.

게다가 난 혼날 짓을 하지 않았어도 가끔은 단체기합을 받는 억울한 순간을 겪는 곳, 어린 꼬마가 반장이라는 이유로 책임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즐거우면서도 역경이 가득한 곳이었다.

(난 90년대생이니 엄-청 옛날 사람은 아닌데 우리 동네 초등학교는 유난히 구식이었다...)


그래서 내가 상상한 미국 학교 또한 이렇게 "고생스러운" 곳이었는데, 그 고생스러운 곳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공부까지 해야 한다니,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남자애들이 영어로 놀리면 어떡해, 선생님은 매 들고 영어로 화를 낼 텐데 그럼 얼마나 무서울까, 나는 혼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데 영어 못해서 매일 혼나면 어떡해..


미국 학교에 안 다니겠다고, 다시 한국에 가겠다고 난리를 칠 때 엄마 아빠가 약속을 했다. 학교에 딱 세 번만 가보고, 그래도 한국에 가고 싶으면 아빠랑 한국으로 가도 된다고.

그렇게 약속을 하고, 아직은 방학이라 텅 빈 Romona Elementary School을 구경하러 갔다.

엄마랑 이모가 미국인 선생님 한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 우리는 다 같이 학교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여긴 학교가 아니라 엄청 좋은 유치원 같잖아?!

떼쓰던 내 마음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분필가루 날리는 녹색 칠판이 아닌 화이트보드, 짝꿍이랑 선 긋고 티격태격할 필요 없는 1인용 예쁜 책걸상, 알록달록한 게시판과 카펫 바닥, 벽에 가지런히 있는 책들과 지구본, 그리고 먼지 날리는 모래 운동장이 아닌 넓은 잔디 운동장! 미술실, 음악실, 컴퓨터실도 따로 있고, 도서관은 또 왜 이렇게 예쁜 건지!

세상에, 내가 상상했던 것과 일치하는 게 단 한 개도 없었다. 한국 학교는 온통 흑백이었는데 여기는 사방이 컬러풀했다. 너무너무 예쁜 학교였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없는 빈 학교였지만 그들에 대한 두려움도 잊었다.

"나 미국 학교 다녀볼래요!"


그렇게 나는 Romona Elementary School의 2nd grader로 새 학기를 맞이했다.

학교에서 준 School supplies 리스트에 적힌 새 학용품으로 가득 찬 빳빳한 백팩을 메고 학교에 갔다. 실내화 주머니가 필요 없는 학교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배정받은 교실에 들어가니 담임선생님인 Ms.Dietrich이 날 맞아주셨다.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나를 다시 문 옆으로 데려가서 또 어쩌고 저쩌고 영어로 내게 질문을 했다.

...?

영어를 조금 알긴 했지만 다 알아들을 리가 없는 7살의 나.

선생님을 쳐다본 그 순간을 난 잊을 수가 없다. Ms.Dietrich는 해그리드처럼 긴 곱슬머리에 덩치도 큰 백인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그런 거대한 사람과 마주하는 것도 처음이거니와, 고개를 위로 쭈욱 젖혀야 보이는 선생님 눈은 무서우리만큼 파랗고 투명했다. 책에서나 보던 파란 눈을 처음으로 직접 본 순간이었다.

눈동자는 그냥 동그라미가 아니구나. 동그라미 안에 또 동그라미가 있고, 그 주변엔 뭐가 많구나.. 무서워. 어딜 봐야 하는 거지?

쑥스러움이 많던 나는 사람의 눈을 잘 못 마주치는 꼬마였는데, 사람들과 얘기할 땐 눈을 봐야 한다는 엄마의 가르침을 따르려 눈 마주치기 연습을 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게 예전만큼 부끄럽진 않았지만 Ms.Dietrich의 눈은 달랐다. 무서웠다. 파랗고 투명한 눈이라니! 피하고 싶었지만 꿋꿋이 그 오묘한 눈을 바라보며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 걸까 열심히 들었다. 

선생님의 샬라샬라 대부분을 못 알아들었지만 Do you have a lunch bag? 을 캐치한 나는 No라고 대답했고, 파란 눈의 선생님은 Juyeon이라고 쓰여있는 내 이름 카드를 "Buy" 바구니에 넣었다. Buy 바구니 옆엔 Bring 바구니가 있었다. 매일 아침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날 점심을 싸왔는지 학교에서 사 먹는지 여부에 따라 이름 카드를 Buy 혹은 Bring 바구니에 넣어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셨다.

'아, 나는 선생님의 무서운 파란 눈도 똑바로 쳐다봤고, lunch, bring, buy를 아니까 매일 아침 해야 할 일도 알아들었어!' 뿌듯함과 안도의 마음을 안고 또 선생님을 따라갔다.

이번엔 게시판 쪽으로 데려가더니 내 이름이 적힌 기차 모양 카드를 Social Studies 아래에 붙이고는 샬라샬라 어쩌고 저쩌고 설명을 했다. 무슨 설명이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모른다. Social Studies 위에는 Science랑 Math가 있었다. 어? 나 저 단어는 아는데, 왜 내 이름은 하필 모르는 단어에 붙어있지? Social Studies가 무슨 뜻인지는 그날 하교 후 엄마한테 바로 물어봤지만 "사회"라는 한국어도 잘 모르던 일곱 살에겐 그저 어려운 단어일 뿐이었다. 그 게시판의 이름 카드는 정기적으로 다른 과목 밑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하지만 이름이 어디에 붙어도 딱히 주어지는 임무는 없었다. 아니면 나만 모르고 미국 애들은 알아들은 임무가 있었으려나. 평생 풀지 못할 수수께끼다.


그렇게 일곱 살 꼬마의 즐거운 미국 생활이 시작됐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들이 꽤 많은데 해그리드를 닮은 선생님의 파란 눈을 본 그 아침과 그 교실 풍경은 유난히 자주 생각난다.

소극적이고 겁 많은 나는 도전 자체를 싫어했고 한국인의 까만 눈도 피하는 아이였는데, 무서운 파란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본 그 순간이 끝없이 놓여있는 challenge라는 내 인생 도미노의 첫 조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작은 첫 조각이었지만, 첫 조각만 쓰러트리면 자연스레 그림이 완성되는 도미노처럼, 후에 마주한 거대한 challenge 조각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힘의 원천도 Ms.Dietrich의 파란 눈을 마주 본 그 순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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