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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똑똑한 인간들과 신이 마주한 곳

by 연주신쥬디

코르푸, 카타콜론을 거친 크루즈는 아테네 인근의 피레우스 항에 도착했다.

이번 크루즈는 6일 연속으로 보석 같은 항구에 정박하는, 알짜배기 일정이면서도 체력적으로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월요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화요일: 몬테네그로 코토르

수요일: 그리스 코르푸

목요일: 그리스 카타콜론

금요일: 그리스 아테네

토요일: 그리스 산토리니

일요일: Sea day

월요일: 이탈리아 나폴리


아테네에 도착한 날은 2018년 4월 25일이었다.


코닝스담이 거대한 도시의 입구에 살짝 걸터앉은 듯 정박하던 그날 또한, 이전까지의 날들처럼 눈부시게 맑은 날이었다.

5일 연속으로 나가서 탐험하느라 살짝 귀찮고 피곤하긴 했지만 아테네까지 와서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베프와 난 부지런히 준비하고 크루즈에서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었다.

아침부터 나가는 일정이 아니면 느지막이 뷔페에서 일반 조식을 먹었지만, 조금 일찍 나가야 하는 날이면 오전에만 먹을 수 있는 베이글 샌드위치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우리의 루틴이었다.

사 먹었으면 최소 12불은 했을 연어 베이글 샌드위치.. 모든 음식이 공짜였던 너무나도 그리웠던 날들이여….. ㅎㅎ


우리 크루즈가 정박한 피레우스 항구는 아테네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항구 도시인데, 보통 관광객들은 유료 셔틀을 타고 어느 정도 나가서 버스를 타고 아크로폴리스 근처로 이동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셔틀비도 아낄 겸 걷기로 했다. “어차피 날씨도 좋은데 걷지 뭐~”라는 늘 그렇듯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정류장까지의 거리는 꽤 됐지만 베프와 재잘재잘 수다 떨며 걷는 길은 늘 신났다.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았던 걸까? 한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꽤 걸어간 후, 로컬 시내버스를 타고 아테네 도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보는 풍경부터 이제까지 봐온 유럽의 풍경과는 조금 달랐다.

일단 영어 알파벳이 아닌 그리스어 간판으로 가득해서 “진짜 외국”에 온 기분이 좋았다.



시내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두 눈에 펼쳐진 도시의 모습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도로의 풍경, 사람들 옷차림, 거리의 소음까지.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그리스라는 낯선 나라에서, 왠지 모르게 ‘한국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떠난 지 10년이 넘은 한국이 그리워지면서 한국에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꾸물거렸다.


낯설면서도 정겨운 아테네 시내를 걸어서 아크로폴리스 언덕 쪽으로 향했다.

아크로폴리스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도심에서 걸어가는 동안 멀찌감치 서도 볼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 봤던 그 고대 신전이 진짜로 눈앞에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언덕을 오르자마자 대 원형극장을 볼 수 있었다.

내 역사 지식은 매우 얕지만,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투표를 하는 등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곳이 바로 그리스라는 건 기억한다.

이런 원형극장에 모여 언쟁도 벌이고 지도자도 세우고, 공연도 했겠지?

그 옛날에 무거운 돌을 어떻게 옮기고 다듬어서 이렇게 큰걸 만들었나 몰라.


원형극장을 뒤로하고, 우리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원형 기둥 사이로 돌계단을 올랐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진 않았다.

돌기둥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구름은 딱 그리스 국기의 느낌을 띄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에서는 아테네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을 테두리 삼아 낮은 건물들이 빼곡했는데,

건물이 대부분 흰색이라는 점 외엔 정말 한국의 소도시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제우스 신전도 볼 수 있었다.

완공되기까지 약 600년이 걸릴 정도로 아테네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다는데, 원래는 100개 넘게 있던 기둥이 지금은 15개만 남아있다.

아크로폴리스 구경 끝내고 저기까지 걸어가야지~


’ 그리스 신전‘ 하면 딱 떠오르는 파르테논 신전!!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크고 대표적인 신전이 아닐까?

파르테논 신전 일부는 공사 중이어서 전체 사진을 예쁘게 담지는 못했지만, 기둥 하나만으로도 압도적인 자태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신을 경외했으면 이 언덕에 이런 신전을 지었을까.

이 날은 푸르고 예쁜 하늘이었지만, 이렇게 끝없이 넓은 하늘에서 비바람이 불고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면 그 누구라도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수학에 강한 그리스일지라도 자연의 위대함 앞에선 그 모든 게 무력해진다는 걸 깨달은 거 아닐까.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에 의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 바로 아크로폴리스였다.

광장에 모여 회의를 하고 사색하면서 철학도 발달했지만 “에라잇,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 하며 신을 찾았을 그들.

아니 어쩌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 돌을 나르고 쌓는 단순 노동으로 머리를 비웠을지도 몰라..ㅋ ㅋ ㅋ


파르테논 신전 저 너머에는 에레크테리온이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에레크테리온은 전형적인 신전의 밸런스 잡힌 모습보다는 조금 짓다 만 것 같은 비대칭이 특징이었다.

신전 기둥이 여인상인 점 또한 특징이었다. 아테나 니케 신전도 있었는데 솔직히 뭐가 어떻게 달랐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난다.

크루즈 피아니스트 시절에 건진 내 사진은 몇 장 안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아크로폴리스에서 베프가 찍어준 사진이다.

이 날 처음 개시한 갈색 가죽 가방은 바로 전날, 카타콜론(Katakolon)이라는 그리스 항구에 정박했을 때 길거리 시장에서 구매한 가방이다.

베프랑 나는 이런 취향도 비슷해서 나는 갈색, 베프는 핑크색으로 가방을 장만했다.

숄더백으로도 멜 수 있고 백팩으로도 변형 가능해서 실용성 최고!!!!

지금은 많이 해졌지만 5-6년 가까이 정말 잘 가지고 다니던 그리스 기념품이었다.



아크로폴리스 구경을 마치고 베프와 나는 언덕을 내려와 아테네 시내 구경을 시작했다.

조금만 더웠어도 하루 종일 걷기는 힘들었을 텐데, 정처 없이 걷고 조금 헤매더라도 짜증이 나지 않을 완벽한 날씨였다.



시내 한복판에 갑자기 황폐한 유적지, 로마 아고라(Roman Agora)가 있었다.(왼쪽 사진)

로마 시대에 상업 중심지로 사용되었고, 상업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모임을 가졌던 곳이다.

로마 여행 갔을 때에도 이런 비슷한 유적지가 도심에 있었는데, 우리나라도 이런 광장을 그대로 보존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른쪽 사진은 히드리아누스의 문(Hadrian’s Arch)이다. 로마 황제 히드리아누스가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는데, 문을 중심으로 고대 아테네, 히드리아누스 시대의 새로운 아테네 구역을 상징한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다본 제우스 신전에도 다녀왔는데, 이쯤 되니 그저 또 하나의 돌덩이구나… 싶었는지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스는 돌덩이들 보존해서 돈을 잘 버는구나. 부럽다.


특이하게 생긴 나무로 시선이 갔다.

잔가지는 거의 없는 굵은 나무줄기에 깻잎 같은 나뭇잎이 자라는 게 신기했는지 사진으로 남겼다.

돌덩이 구경 하루 종일 했으니 이제 아기자기하고 예쁜 거 구경할 시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플리 마켓을 지나며 ‘아 귀여워.. 이거 살까?’를 수십 번 외쳤다.

그런 나를 워워 시켜주는 건 늘 베프의 듀티였다. ㅋㅋㅋ

갖고 싶은 수많은 예쁜 템을 뒤로한 채, 우리는 또 귀걸이를 하나씩 기념품으로 소장했다.

그리스를 상징하는 컬러 블루!

아직도 그 귀걸이를 볼 때마다 베프와 함께 거닐었던 아테네의 시내가 눈에 선하다.

마침 공연도 없는 일정이라, 저녁까지 아테네 시내를 누비고 여유롭게 크루즈로 돌아갔다.

저녁 뷔페 마감 후에 들어간 터라, 야식으로 베프와 피맥을 즐겼다.

역시 모든 게 공짜였다.

아니지, 참, 맥주는 1불이었다.


아테네에서의 하루 또한 이전 날들처럼 반짝이는 순간으로 가득했다.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늘 에너지로 가득했던 나날들, 이날 밤 또한 베프와 이 층침대에서 노닥거리다가 꿀잠에 들어 체력을 풀 충전 했다.

다음 날은 바로 산토리니 탐험해야 하니, 작지만 아늑한 캐빈에서의 밤잠은 늘 깊었고 소중했다.

우리의 보금자리, A207 캐빈은 자연광이 들지 않아 조명을 끄면 밤이든 낮이든 암흑이었다.

그런 암흑에서 몇 개월간 자서 그런지, 크루즈에서 일한 이후로 나는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쉽게 깨는 체질로 변했다.

이땐 하루 종일 샌들 신고 걸어도 신이 났는데, 요즘은 운동화 신고 지하철역 몇 번만 왕복해도 하루 걸음 할당량을 넘기는 기분이다.

결코 내 체력이 저하된 건 아닐 거야. 지금도 매일 지중해 관광지 돌아다니라고 하면 더 신나게 다닐 자신이 있지.

그때보단 살이 빠졌으니 예쁜 사진도 더 건질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여행, 연주, 친구들”과는 꽤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만, 한 때 이렇게 행복한 베짱이로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삶에도 소소하게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거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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