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냐처럼" 시체를 쌓았던 아픈 역사의 도시
그리스 네 개의 도시 탐방을 마치고 나니 이번 10-day크루즈는 어느새 끝자락이었다.
마지막 항구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였다.
나폴리를 마지막으로 찍으면 대부분의 승객은 내리겠지만, 나는 이 배를 ‘집’으로 삼아야 하는 날이 아직도 석 달이나 남아 있었다.
그 말은 즉슨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나를 기다리는 지중해 Port of Call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고, 지중해 구석구석을 누비고 나서도 북유럽까지의 여정이 남아있다는 것.
매일 신나게 여행하고, 연주하고, 새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크루즈에 탄 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 날은 원래 친구 호르헤(Jorge)랑 같이 나가려던 계획이었다. 물론 베프도 같이, 셋이서.
호르헤는 크루즈 내 스파에서 의사로 일하는 친구로, 콜롬비아 출신에 내가 딱 좋아하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선한 인상에 잘 웃으며 대화하는 남자. 성격도 좋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텐션 너무 높지 않아서 같이 있으면 편안한 남자.
하마터면 그 친구를 좋아할 뻔했지만 그는 남자친구가 있는 남자였기에 다행히도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
배에서 내리기 전, 여느 때와 같이 베프랑 아침을 먹고 있는데 호르헤가 I’m so sorry 하며 우릴 찾아왔다.
갑자기 트레이닝이 생겨서 우리랑 같이 놀기로 한 계획에 차질이 생겨버린 것이다.
크루즈 라이프란 예기치 못한 일들이 빈번한 거 아니겠는가?
괜찮다며 next time! 하고 쿨하게 호르헤를 보내고 베프와 둘이 배에서 내렸다.
나폴리..라고 하면 피자 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나폴리의 볼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듯했다: Catacombs(카타콤) 투어 VS 폼페이 투어
폼페이 투어가 더 파퓰러 했지만 폼페이는 항구에서 거리가 꽤 되는 관계로 나는 멀리 가기 귀찮아서(?) 카타콤 투어를 택했다.
배에서 내렸더니 커다란 성벽이 떡 하니 있었고 크고 작은 배가 즐비해있었다.
비린내가 살짝 나는 항구를 지나 도심으로 걸었다.
오래된 건물들과 정돈되지 않은 거리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나폴리와는 사뭇 달랐다.
구글맵을 따라 목적지에 도착해서 투어 그룹과 가이드를 만났다.
폰타넬레 공동묘지 (Cimitero delle Fontanelle)와 산 제나로 카타콤(Catacombe di San Gennaro) 투어였다.
고등학교 때 US History는 싫어했어도 World History는 나름 재미있어했는데, 내 역사 지식은 다 어디로 소멸된 건지
이날 들은 해설은 내가 전혀 모르던 역사 이야기였다.
폰타넬레 공동묘지 (Cimitero delle Fontanelle)에 대한 해설을 들으며 가이드를 따라다녔다.
굉장히 센 이탈리안 억양이 섞인 영어를 하는 이탈리안 아저씨였는데, 그의 몰입감 있는 설명은 귀에 쏙쏙 들어왔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때 배운 지식은 또 대부분 소멸했지만 그때의 충격과 서늘함은 선명하다.
서늘하고 으스스한 폰타넬레 공동묘지에서는 수백 개의 해골을 볼 수 있었다.
전염병(흑사병, 콜레라 대유행)이 나폴리를 휩쓸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갑자기 수만 명의 희생자를 급하게 매장해야 하다 보니 이렇게 큰 동굴을 공동묘지로 만든 것이다.
그때 병으로 죽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연고가 없는 사람들과 빈민층 또한 이곳에 단체로 묻었다고 한다.
실제 해골을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중학교 때, 사촌 오빠가 캄보디아 선교에 다녀와서 찍은 킬링필드 사진이 떠올랐다.
그 사진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이번엔 사람 뼈 실물이 사방에 있었다.
당시 나폴리에서는 해골을 돌보는 문화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골을 골라서(?) 그 해골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기도했다.
그 영혼이 구원되면, 그 덕분에 자신에게 복이 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골 주변엔 동전, 묵주, 액세서리 등이 놓여있었다.
죽은 이를 기리는 문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해골을 ‘입양’하듯 돌보는 관습은 상당히 특이하다.
게다가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는 결국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한 것 아닌가?
그 마음이 좀 얄밉게 느껴졌다.
'이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나'는 복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 그런 자의식이 이 문화를 흥행하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은 어떤 종교에서든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남을 위한 기도나 선행이라는 껍데기 속엔,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나 자신을 위한 바람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본인은 순수한 이타적인 마음이라 믿을지 몰라도, 무의식 속엔 분명 욕망이 존재할 것이다.
후에 나폴리는 공식적으로 이 전통을 금지했다고 하는데, 여전히 전통을 이어가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더 많은 설명을 들었지만 기억나는 건 여기까지다.
으스스한 폰타넬레 공동묘지를 나와 우리 투어그룹은 근처 산 제네로 카타쿰으로 이동했다.
카타콤은 한마디로 지하 무덤인데, 기독교인들이 공동체 구성원을 매장하기 위해 지하에 만든 공동묘지다.
그래서 카타쿰 내에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물고기, 십자가와 같은 게 새겨져 있었고 성자의 형상을 띠는 벽화도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공동묘지였지만,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카타콤은 비밀리에 예배를 드린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시체들을 옆에 두고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고, 황제 숭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반역자로 여겨져 죽임을 당해 또 카타콤에 묻혔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신앙과 예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산 자와 죽은 자가 여기서 함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카타쿰 내벽은 시체를 차곡차곡 뉘어놓을 수 있는 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이드는 시체를 "라자냐처럼" 차곡차곡 쌓았다고 표현하며 층층이 쌓인 시체 칸을 가리켰다.
"They stacked the bodies like lasagna."
비유 자체도 웃긴데 그의 이탈리안 억양이 웃음을 더 자아냈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 피식했을 뿐, 그 비극을 생각하니 결코 웃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카타콤은 희생된 기독교인들의 거대한 납골당인 셈이다.
무덤 칸 하나하나는 시체의 크기에 맞게 제작되었는데
어린이, 유아 사이즈의 작은 칸들도 많았다.
"라자냐처럼"쌓인 칸 형태 외에 방 형태의 무덤도 있었는데 그곳엔 가족이나 공동체가 함께 묻히는 공간이었다.
그 모든 자리에 시체가 놓여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한데, 예배를 위해 그 안에 사람들이 모였다니..
신앙의 위대함이란..!!!
이탈리안 가이드의 열정적인 해설을 귀 기울여 들었지만 더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 희생자들과 예배자들을 떠올리며 들었던 무거운 마음, 죽은 동료들 곁에서 예배를 했던 그들에 대한 존경, 편안하게 예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게을리하는 내 모습에 대한 회개로 마음을 가득 채운 채로 산 제네로 카타콤 투어를 마쳤다.
베프와 함께 시내를 거닐었다.
지금까지 본 지중해 도시 중 가장 낡은 시내였지만 사람들은 삼삼오오 카페테라스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하여튼 간에 유럽인들은 참 야외를 좋아해.ㅋㅋ
크루즈로 돌아가는 길에 시장 골목도 지나쳤다.
파스타의 나라답게 다양한 파스타가 가게마다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리몬첼로도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리몬첼로를 보니 대학생 시절 동생과 피렌체 여행 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동생이랑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을 했는데, 호스트 할아버지 안토니오가 저녁식사 후 리몬첼로를 한잔씩 돌리며 이탈리안 전통 디저트주라고 소개해줬다. 처음으로 리몬첼로의 맛을 본 자리였다.
카우치서핑은 현지인이 관광객에게 무료로 숙소를 제공해 주는 플랫폼이다.
에어비앤비와 달리, 현지인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교류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아내와 사별한 후 아내의 빈자리를 채울 겸 이탈리아 문화를 나눌 겸 카우치서핑 호스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큰 집은 아니었지만 이층 침대 여러 개를 두고 관광객을 재워주는 마음씨 따뜻한 아저씨였다. 우리가 지냈던 밤에도 손님이 무려 6명이나 있었는데 미국에서 온 젊은 남자애들이 아저씨한테 얼마나 무례하던지, 보는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리몬첼로를 보면 꼭 그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잘 지내시려나.
피렌체에서 파리로 넘어가서도 카우치서핑을 했는데, 파리에서 만난 호스트는 나랑 동갑인 예쁘고 착한 여자아이였다. 이 흉흉한 세상에 그 착한 친구가 카우치서핑 호스트를 하는 게 걱정돼서 그녀에게 몇 번이고 사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역시나 돈 한 푼 안 받고 나와 내 동생을 재워주고 먹여줬고, 2박 3일간 많이 가까워진 친구였는데.. 몇 년 후 페이스북을 통해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봉사활동차 네팔에서 지내는 동안 태풍 속 급류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튼, 리몬첼로를 보고 그때를 잠시 회상하고 나는 가던 길을 이어갔다.
날씨가 흐린 건 아니었는데, 내 기억 속의 나폴리는 무채색의 도시다.
아무래도 공동묘지, 카타쿰 투어에서 어두운 이야기를 들어서 그렇겠지?
그리고 나폴리에서 피자집을 갔을 법도 한데 나와 베프는 그대로 크루즈로 돌아왔다.
폼페이 투어에 갔다 온 친구들은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카타콤 대신 그 투어 갔다 왔어도 우울했겠구먼!?
크루즈는 나폴리 항구를 떠나 내가 손꼽아 기다리던 my happy place 발렌시아로 향했다.
내 인생 가장 즐거웠던 1년이 담긴 발렌시아!!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