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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n번째 고향 발렌시아 스페인

버클리, 친구들, Pink Sky와 함께 가장 빛나던 날들

by 연주신쥬디

발렌시아는 내게 가장 특별한 도시다.
대학원 과정을 버클리 음대 발렌시아에서 보내며,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1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보스턴에서 학사 과정을 밟던 4년 반 동안은 음악이 주는 즐거움보다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훨씬 컸다.
하지만 발렌시아에서 보낸 1년은 음악의 본질적인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 줬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음악이 무엇인지 조금은 발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부담감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발렌시아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연주를 멀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2016년 여름, 찬란한 졸업 공연으로 석사 공부를 마무리하고 발렌시아를 떠났다.

시카고로 돌아와서는 발렌시아에서의 일상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언제 또 갈 수 있을까' 그리워하곤 했다.


이번 크루즈 계약 오퍼를 받았을 때, 크루즈 itinerary에 발렌시아가 있는 걸 보고는

이보다 더 좋은 오퍼는 없을 거야!!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해!!!!! 하며 더없이 기뻐했다.


드디어 대망의 발렌시아 정박일.

두근두근.. 2년 동안 그리워했던 sunny Valencia!

마침 버클리 발렌시아에 재학 중인 친구들도 몇 명 있어서 그들과의 만남을 약속해 두었다.

항상 같이 다니던 베프는 발렌시아에 연고가 없어 이날만큼은 혼자 크루즈에서 내렸다.


관광객이라면 Old City를 구경하겠지만 나는 관광 모드는 스킵하고 바-로 버클리 캠퍼스로 향했다.

발렌시아 하늘은 역시 청명했다.

그래, 이런 맑은 하늘과 햇살을 매일 누렸으니 난 여기서 행복할 수밖에 없었지.

버클리 캠퍼스가 있는 City of Arts and Sciences (Palau de les Artes)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2015년 여름 처음으로 발렌시아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비록 버클리 캠퍼스는 이 아름다운 건축물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매일 등하굣길에 이곳을 지나던 순간이 내 행복지수를 크게 끌어올려주곤 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Palau de les Artes 건축물을 한껏 눈에 담으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겉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와 공간은 그대로였지만 보고 싶은 친구들은 물론 없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모두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번엔 쌀쌀맞은 세큐리티 아줌마밖에 익숙한 얼굴이 없었다.

연습실, 컴퓨터실… 늦은 밤 작업을 함께하고 집에 가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아.. 저 그랜드피아노는 거의 내 개인소유처럼 독차지했었는데.. (그래서 그랜드 피아노 아니면 치기 싫어하는 자칭 "그랜드피아노 된장녀"가 되었다.)


혼자 어색하지만 당당하게 복도 구석구석을 지나 교수님들을 만나러 갔다.

조금 서먹한 케이시 교수님과는 간단히 안부를 나누고, 내 담당교수님 빅터와 폴로를 만나서는 Biiiiiiiig hug를 나눴다.

I missed you!!!!!!!! ㅠㅠ

나를 참 많이 예뻐해 주셨던 두 분, 교수님이지만 친구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배울 점이 참 많았던 두 분..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난다는 건 가족으로부터의 독립만큼이나 큰 변화인데

졸업이라는 기쁨에 가리어져 그 무게를 간과하는 것 같다.

이런 선생님이 늘 주변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ㅠ ㅠ

떠나고 나면 알지, 멘토와 커뮤니티의 소중함을.


교수님들과는 잠시 후에 카페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타파스 집에서 도미닉과 친한 Y언니를 만났다.

도미닉은 알래스카 크루즈 때 만난 영국 친구인데 ([크루즈 피아니스트 in 알래스카] 편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발렌시아에서 요트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도미닉을 또 만날 줄이야, 그것도 발렌시아에서!!

우린 만나자마자 내 미국 발음과 그의 영국 발음을 서로 놀리며 3년 만에 반가운 재회를 했다.


그리고 내 뒤를 이어(?) 버클리 발렌시아에 나랑 같은 전공 재학 중인 친한 Y 언니도 만났다.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공감하며 근황 토크를 나눴다.

시간만 있다면 하루 종일 수다를 떨었겠지만 둘 다 일정이 있었기에 코르타도 한잔처럼 작지만 찐하고 풍성한 수다를 쏟아냈다.

(후에 언니와 나는 한국에서 "코르타도"라는 월드뮤직 밴드를 결성했고 지금도 활동 중이다.)




발렌시아 마지막 코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카페, Cafe Mamas 방문이었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도 내 취향이었지만 그곳을 특히 좋아했던 이유는 항상 밝은 웃음으로 대해 주시는 친절한 사장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내 짧은 스페인어 때문에 사장님과 많은 대화를 한 적은 없지만 그녀의 표정과 제스처만으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2년 만에 왔는데 사장님께선 당연히 날 기억해 주셨고 스페인식 인사 볼뽀뽀로 격하게 환영해 주셨다.



아, 물론 커피와 음식은 당연히 맛있었다.


스페인 카페에서 빼놓을 수 없는 Cafe con leche, 내가 가장 좋아하던 메뉴 Tostada de salmon!!! 그리고 100% 오렌지 주스, 새콤달콤 zumo de naranja!!


같이 학교생활을 했던 드러머 친구 Pancho를 만났다.

(판초는 예쁜 딸이 있는, 나보다 족히 10살은 많은 아저씨지만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우린 모두 "친구"다. 그게 너무 좋다.)

나는 연주를 잘해놓고도 항상 부끄러워하고, 자신 있게 뽜!!!! 하고 치지를 못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럴 때마다 판초는 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쥬디 너는 베스트 피아니스트라며, 뭐든지 할 수 있으니 just do it! 하고 용기를 심어주는 친구였다.

말로만 하는 격려가 아니라, 판초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넌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진심이 느껴졌다.

판초는 버클리 과정을 마치고 발렌시아에 남아 박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본인 정규 앨범을 냈다며 CD도 한 장 선물로 줬다.

정규 앨범을 내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인데, 역시 묵묵하게 해내는 멋있는 뮤지션 판초, 그리운 내 친구.

지금도 그리운 발렌시아 친구들...

판초와의 만남은 또 다른 선물이었다.



또, 버클리 석사 입시 준비동안 시카고에서 나에게 레슨을 받았던 S 동생도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음악 전공은 밤샘 작업도 많고 컴퓨터 들여다보는 게 일상인데 힘든 내색 안 하고 예쁜 미소로 날 반겨줬다. 참, 인연이란 게 신기하지.

S 동생은 시카고 교차로(한인 커뮤니티)에 내 레슨 홍보 글을 보고 레슨 문의를 줘서 연이 닿은 친구인데, 나한테 레슨을 받다가, 나 때문에(?) 버클리 발렌시아에서 영화음악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S 동생 역시 작곡가로 지금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렇게, 발렌시아 버클리에선 귀한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음악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예쁘고 소중한 내 동료들.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두가 타지에서 온 "유학생"이어서 그랬는지 정이 깊게 들어서 졸업식땐 나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발렌시아는 내게 특별한 도시로 남아 있다.



아래 사진은 하굣길 view 찍어놓은 옛날(2015) 사진이다.

퇴근길!

이 램프를 나가서 탁 트인 하늘을 보면 '아 오늘 일정 끝!' 하는 순간이었는데

핑크 스카이가 보이는 날이면 유독 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난 음악을 만들 줄 알지만 누가 시키지 않으면(입금되는 게 아니면) 자발적으로 곡을 잘 안 쓰는 게으른 작곡가인데, 발렌시아에서 핑크빛 하늘로 물드는 노을을 보고는 "Pink Sky"라는 곡을 만들어서 싱글로 발매했다.

"어머 이건 곡으로 남겨야 돼" 하는 순간이었달까?


핑크 스카이를 같이 바라보던 친구들과 함께 녹음해 졸업 직전 발매한 이 곡은, 지금도 발렌시아의 향수를 불러온다.

살짝쿵 곡 링크를 남겨야지: https://www.youtube.com/watch?v=LFrlwPJGfnI


한국, 제2의 고향인 미국 시카고랑 보스턴도 애틋하지만 발렌시아는 유독 그리움이 크게 남는 꿈같은 곳이다.

자주 갈 수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갈 수 있다고 한들 남아있는 건 껍데기뿐, 내게 정말 의미 있었던 사람들과 음악을 재연할 수는 없기에 내가 겪은 시간 그 순간의 소중함이 더 크게 남았다.


그런 발렌시아에 잠시나마 데려다준 크루즈가 너무 고마웠다.

해 진 후에 출항이라면 핑크빛 노을을 한번 더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해가 중천에서 내리쬘 때 크루즈는 발렌시아를 떠나 다음 정박지로 향했다.


크루즈로 돌아가기 전, 내가 즐겨 가던 학교 앞 편의점 SuperCor에 들러서 가장 좋아하던 간식을 사갔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크루즈로 돌아와 발렌시아에게 또 한 번 안녕을 했다.

이번엔 진짜로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그동안은 살짝 희미해졌던 발렌시아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금 꾸물거린다.


또 하나의 발렌시아 추억 조각을 만들어준 코닝스담 크루즈는 스페인 해안을 떠나 포르투갈로 향했다.

'Pink Sky라는 곡 써야지' 다짐한 순간 찍은 사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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