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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Nov 26. 2024

드디어 잘 지낸다 할 수 있어서.

11월 월간 일기

https://youtu.be/95cYcfQE6f8?si=LTi7lkEWlYGPVKqn


분명 작년까지는, 아니 올해 초까지는 월간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봄이 왔지만 나의 일기장은 겨울에 멈춰있었다. 일기를 쓸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봄을 지나, 무기력하게 누워 지낸 여름을 지나, 몸이 마음 같지 않던 가을을 보내고 첫눈이 예정된 겨울의 초입. 비로소 나는 드디어 잘 지낸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을 되찾기 시작했던 11월은 올해 역대급으로 외출이 많았던 한 달이었다. (알바도 있었거니와 지난 시간 동안 외출은커녕 연락조차 잘 받지 않던 시간들을 보냈었다.) 느지막한 가을을 즐기게 해 주었던 11월은 내 생일이자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둔 25일 이후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겨울이 왔음을 알려주는 계절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겨울이 다가오고 올 한 해가 한 달 남짓 남은 지금, 나의 2024년은 이제야 시작된 듯하다.


그동안은 나의 안부를 묻는 질문에 잘 지낸다고 답하기 버거웠고, 상대의 걱정도 부담스러웠으며, 나를 향한 모든 이들의 배려와 연락을 바라는 이들의 기다림 또한 언젠가 내가 답해야 할 숙제 같았다.

그렇게 상대가 주는 온기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나를 향한 애정에 나는 그런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더욱 땅굴로 깊이 숨어들었다. 그렇게 나는 잘 지내지 못했다.


피어나는 꽃을 보고 심술을 부리고, 덥고 습한 날들을 물 먹은 솜처럼 보내고, 여전히 나는 따스한 어떠한 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며 버석하게 메마르기 시작하던 9월의 마지막 일요일. 생애 첫 아이유 콘서트를 다녀오고 나서 펑펑 울었다. 마땅히 해야 할 끝맺음을 맺지 못한 나도, 되도록 많이 행복해도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행복을 찾기로 아니 갖기로 결심한 가을, 나의 일기장은 나의 마음을 따라 다시 넘어가기 시작했지만, 나의 몸은 나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여름 내내 말썽이었던 미주신경성 실신이 제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의식까지 완전히 잃은 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들의 대가 없는 선의 덕에 무사히 구급차를 타고, 찢어진 상처를 몇 바늘이나 꿰매고 나서야 나는 나를 챙기기로 다짐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히 행복해지고 싶었다. 잘 지내고 싶었다. 내겐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날 모르는 이들도 나를 이렇게 챙겼는데, 이들보다도 더한 시간들을 묵묵히 챙겨주던 이들도 있었는데, 내가 나를 챙기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밥을 잘 챙겨 먹고, 겨울이 오면 하지 못할 산책을 즐기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고. 봉사를 가고, 애정하는 이들을 만나고, SNS를 하고, 글을 쓰고. 그렇게 그림 계정과 필사 계정을 만들고, 책을 사고,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새로이 생겨나는 약속들이 반갑고 즐거웠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여윈 나의 모습에 안쓰러워하기도, 예전 같은 나의 모습에 안도하기도, 나의 새로운 도전에 응원을 하기도 했다.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아있는 나의 불안은 네가 행복할 자격이 있냐며, 이렇게 지내도 괜찮겠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할 수 있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잘 지내고 싶다.


내가 내 스스로와도 잘 지내고 싶고, 내가 애정하는 이들과도 잘 지내고 싶고, 내 미래와도 잘 지내고 싶다.

하지만 잘 지내지 못하는 나도 나라서, 나의 나태도, 불안도, 우울도, 예민함도 모두 내 것이어서, 나는 나를 잘 달랠 수밖에 없다. 빈말로나마 잘 지낸다고 말하지도 못했던 지난 시간들을 지나 드디어 잘 지낼 수 있게 된 지금,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비적비적 삐져나오는 나의 불안과의 타협이 남았다.


한평생 달고 다녔던 불안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어디 실컷 잠식되어도 좋다. 나는 내 주변을 둘러싼 애정을 부표 삼아 다시 나아갈 테니.


멈춰있다 지금 실컷 넘어가고 있는 나의 일기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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