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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깃글 Oct 08. 2019

나의 편지

꾹꾹 눌러 담아 더 좋은 마음

여행을 다녀온 남자친구에게 엽서를 받았다

부산집에서 아직도 들고 오지 못한 내 짐들이 있다.
아주 열심히 메모했던 교양과목 <성(姓)의 과학> 교재와 필기 노트
꼴에 국어국문과라 버리지 못한 국어문법, 고전소설론, 문학사, 의미론, 현대소설론 따위의 전공 서적
좋아한다는 표현으로 하나씩은 꼭 구매했던 뮤지션들의 CD 앨범
열심히 읽었거나 읽으려고 사고 받고 모아둔 책 그리고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옛날부터 버리지 않은 내 편지들이다.

매번 부산 갈 때마다 언제 저 박스를 가져갈지 고민만 하다 화석처럼 묻어둔다. 사실 귀찮은 거지.
그래도 꽤 오랜 시간 엄마나 동생이 볼까 봐 조마조마하긴 했다.
지금이야 다 '과거야' '그땐 그랬지'로 넘길 수 있지만 전 남자 친구라든지 나의 상처와 비밀이라든지 집 안의 사람들이 몰랐으면 하는 집 밖의 내 모습이 가득 담겨 있으니까.

최소 15년이 넘는 편지 무덤에는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이 많다. 나와 친하다고 말하는데 도통 그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다. 아무리 지나간 일을 빠르게 잊어버리는 편이라지만 이건 좀 슬펐다. 이렇게 여러 색색의 편지더미가 있다는 건 나도 그만큼 누군가에게 내 글씨와 시간을 전달했다는 뜻이다. 직장인이 되면서 너무 짧은 기간에 약간은 무색해졌지만, 여행을 다녀오면 꼭 엽서를 부쳤다. 나에게 부치고 남자친구, 가족, 친구에게 부치고. 특히 핀란드에 살 때 6개월 간 친구들에게 보낸 엽서가 30개는 넘을 거다(2개 넘게 받은 사람도 있다). 2주간 포르투갈 여행을 떠났을 때도 여행지에서 엽서를 고르고, 우체국을 찾고, 풍경이 아름다운 관광지 또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엽서를 작성하는 나의 모습이 많았다.

그 정도로 나는 아는 사람들에게 좋고 아름다운 것을 글로 공유하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은 편지라는 이름을 달고 개인적이고 비밀스럽게 존재하게 된다. 내 편지를 혹은 엽서를 하나라도 받았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증거다. 혹자는 편지를 작성하는 걸 어려워한다. 이 글을 써 내려가듯 내가 지금 당장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말을 그 상대방에게 나열하기 때문에 너무 쉽고 즐겁다. 짧게는 1분, 길게는 30분 넘는 시간 동안 상대방 한 사람을 위해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가. 또 편지는 피곤함, 불편함, 긴급함과 같은 비언어적인 상황도 전달해 줄 수 있다. 편지지나 글씨체 구경도 쏠쏠하고. 문구점을 지나칠 때마다 귀엽고 예쁜 편지지를 보면 뭔가 설렌다. 이것에 빨리 글씨를 적어 누군가에게 주고 싶어서. 편지는 나에게 이렇게나 어떠한 것보다도 더 값지고 소중한 선물 같다.

이렇게 끄적거리다 보니 왠지 누군가에게 짧게라도 편지를 쓰다가 잠들어야 할 것만 같다. 항상 그리운 엄마에게 써도 좋을 것 같고, 결혼해서 잘살고 있는지 궁금한 친구에게도 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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