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사랑> 단편소설집을 읽고
강남 한복판에서 아주 행복한 너를 만난다면. 풀 마라톤을 열다섯 번째 뛰는 아저씨가 나를 추월해 뛴다면. 몇 년째 앓는 헤드폰을 갑자기 선물 받는다면. 아빠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면. 한라산 백록담까지 올랐는데 폭설이 내린다면. 자니, 카톡이 온다면. 겨울 한복판 추억의 동방신기 노래가 흐른다면.
가슴은 또 뛰고 말 것이다.
<첫사랑>
삶을 절반으로 접으면 순수한 그때가 떠오른다 물기 가득한 건반 위 손가락 음악시간. 좋아한다고 느낀 건 예전부터지만 사랑을 처음 느꼈던 건 그때. 학교를 무단으로 나오지 않는 그가 자꾸 생각나고 그 반주는 내 귀를 너무 맴돌아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집 앞을 찾아가고만 싶었다. 너를 위해 학교를 나오라고, 그 어떤 일이든 나는 다 이해해 준다고, 외칠 수 없었고 일이 년 뒤 결국 고등학교를 일 년 늦게 갔던 너의 싸이월드를 들락날락거리다가 말았다.
<햄릿 어떠세요?>
사랑을 받는 것도 사랑이고, 그것을 깨닫는 것도 사랑이다. 그 모양이 마치 설렘과 두근거림이 아니어도 괜찮을 때가 있다. 덤덤하게 한 방향으로 주어지는 사랑의 화살표를 바라보는 것도 방법이다.
<“괜찮아 니 털 쯤은”>
원숭이인간은 결국 그 ‘괜찮다’는 말을 들으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사랑받는 기분은 굉장히 단순하지만 그 순수한 단순함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엄청난 용기를 내야 한다.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무한한 상상의 공포를 견뎌내야 한다. 그 인정을 받기 위해 무엇을 못할까. 나는 자타공인 셀프 원숭이 인간으로서의 원죄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또한 누군가가 인정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잘하고 있다는 칭찬보다는 못내 숨기는 그 못난 점을 괜찮다고 말해주고 그것이 오롯이 위로로만 다가오는 슬픈 따뜻함을 말이다.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누군가가 내 일기장을 훔쳐본 것 같은 심정으로 읽었다. 아주 긴 연애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만 기다리느라 불을 켜고 있는 나에게 이 소설은 해리포터에 나오는 소망의 거울과도 같았다. 바라는 바를 비추는 그렇지만 현실적인 멀티버스의 서사. A와 연락을 지속하게 되었다면 나왔을 나의 위치, B가 저녁을 먹어주었더라면 진행될 나의 심리 묘사, 그리고 그 결말까지. 처절하고 숨 막혔다. 미래의 내가 후회하더라도 지금의 내가 행복하고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딱 주인공과 닮았더랬다. 단지 바래다주는 길과 그 추억은 오롯이 1인분으로 남았지만 그만큼 갈 수 있는 길까지 간 셈이다. 어떤 새로운 사람과 사랑이 선숙에게 펼쳐질지 몰라도 강력한 축복을 감히 기도한다.
<웨딩드레스>
19번과 39번. 나도 문어춤을 출 거고, 그전에 끊임없이 내 죽음과 배우자의 죽음을 걱정한다. 세상은 사랑은 결혼은 어두운 게 맞으니까. 태양의 웨딩드레스가 울려 퍼지다가 끝은 결혼은 미친 짓이야로 끝나는 메들리 같았다.
<폭설>
많은 눈이 소설에 등장하면 나도 모르게 이청준의 눈길을 떠올린다.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끊임없이 나쁜 행동과 말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폭설 속 모녀가 겹친다. 누구나 마땅히 사랑을 받아야 하며 그 사랑의 근간은 항상 가족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엇이 과하거나 부족했고 넘치거나 새어 나가기도 하는 부모, 특히 엄마의 사랑.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을 때도 모성애만 나오면 숭고해지곤 한다. 비(아닐 비) 모인 입장에서 받은 사랑을 주는 것으로 치환해 상상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린이가 곁에 엄마 없이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제 아이보다 엄마에 몰입하곤 하는 처지가 되었다.
<봄밤>
사실 이 작품은 이번이 세번째이고 이제 오롯이 알류커플의 애틋함과 슬픔이 묻어난다. 많이 쓰리고 아린 과제가 주어진 그들에게 다시 사랑을 선택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또 아름답다. 알코올 중독과 잔인한 고통을 어쩌면 잊게 해 주는 사랑 아니, 사랑을 잊게 해주는 고통과 중독인 걸까. 삶은 그 순서를 따지지 않고 살아있는 자들에게만 다시 물음표를 쥐어준다.
<앓던 모든 것>
쓸쓸하고 낡은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 수영장 물속에서도 자유롭게 발을 차낼 수 없는 그 이야기 나는 아직도 멀게 다가온다고 말하고 싶은 그런 이야기.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섬기는 대상에 대한, 그런 이야기.
<대니 드비토>
넷플릭스 굿 플레이스가 떠오르면서 또 애니메이션 블리치도 떠올랐다. 사랑은 마치 누군가에게 보이거나 닿지 않는 머나먼 세계가 공존하는 것일 수 있겠다.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는 역할과, 평생 알아채길 바라며 이름을 부르는 역할 중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나의 부재가 익숙해지고 새로움이 익숙해지고 늙음과 병이 익숙해지는 연인을 어떻게 지켜볼 수 있을까, 이 담담함에 내가 더 입을 다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