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러닝 AI(이하 알파고)가 한국 최정상급 바둑기사 이세돌 기사를 상대로 연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체스에 관심이 더 많아 바둑을 잘 몰랐기에 게임의 흐름을 알 수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보이는 이세돌의 표정을 보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수를 두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을 바둑으로 이기는 AI.
저는 어렴풋이 예상하기는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비슷한 게임인 체스는 이미 몇십 년 전에 기계에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이 눈앞에 나타나니 받아들이는 감정은 달랐습니다. 이세돌이 3연패를 하고 퇴장하는 그 뒷모습에서 저는 어렸을 때 본 영화 터미네이터가 떠올랐습니다.
고도로 발전된 AI(스카이넷)가 인간과 전쟁을 일으키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당시에는 설마 하고 피식 웃음을 터트릴 상상이었지만 Chat GPT나 그림 AI 등의 탄생과 마치 사람이 제작한 것 같은 AI의 창작 능력을 보니 쉬이 웃어넘길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경각심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터미네이터 영화처럼 기계와 전쟁을 벌이는 날이 실제로 올 수도 있겠단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물론 총과 칼로 하는 전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을 수호하기 위한 직업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발전해 가는 AI에게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전쟁 준비를 하면 좋은 것일까요?
이에, 먼저 AI와 겨뤄본 체스 선수들의 예시를 통해서 대응책을 살펴보았습니다.
"1997년 딥블루, 세계를 놀라게 하다."
체스가 컴퓨터에 따라 잡힌 날은 1997년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적인 체스의 거장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imovich Kasparov.)”는 슈퍼컴퓨터 “딥블루”와 대국하였고 2승 3무 1패(6전)로 슈퍼컴퓨터 딥블루가 승리하였습니다.
이 결과는 당시 큰 화재를 몰고 왔습니다. 체스의 인기가 없고 지원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그리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세계적으로는 “인류가 기계에 패배한 날”이라는 수식어로 수많은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감, 철학적 담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치, 알파고가 이세돌 기사를 4:1로 이긴 것처럼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러한 공포심은 시기상조였지만, 알파고의 데뷔 및 2023년에는 Chat GPT를 위시한 생성형 AI의 범람으로 다시 한번 AI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해졌습니다.
특히 생성형 AI는 인간의 창의성이라고 여겨지는 예술 영역, 이를테면 작문, 그림에까지 그 영역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이에, 인간의 창의성이란 AI가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는 부질없는 능력이고 관련 업계는 AI가 지배할 것이라는 비관론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시각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래서 체스가 망했나?"
소제목과 같습니다.
그래서 체스가 기계에 먹혔나?
그림, 소설과 같은 창작계 보다도 더 먼저 기계에 지배됐다고 평가된 체스는 놀랍게도 여전히 사람의 경기가 운영되며 세계적으로 많은 투자를 받고 있습니다.
중국과 인도의 경우는 국가적인 투자를 통해 인재를 육성하여 GM(그랜드마스터)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수 개개인으로 봐도 탑 체스 선수라고 불리는 “망누스 칼센(Maguns Carlsen)”, “아니시 쿠마르 기리(Anish Kumar Giri, 네덜란드 체스 선수)” 등은 몇십 억대 대회 상금에 국가적 지원 및 관련 강연을 하고 있고, “히카루 나카무라” 선수는 체스를 주제로 한 온라인 스트리머로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금메달을 땄거나 올림픽을 준비하는 스포츠 선수의 모습을 생각하면 얼추 비슷합니다.
딱 잘라서 말합니다. 세계 랭킹 1위에 역대 체스 선수 중 가장 높은 레이팅(2800 이상)을 가지고 있는 “망누스 칼센”도 최신형 체스 프로그램과 1대 1로 붙으면 무승부가 겨우 일 것입니다.
기계가 지배한 체스 세계.
그럼에도 왜 기업은 체스 선수에게 투자하고 관객은 선수에게 환호하고 열광할까요.
필자는 그것을 두 가지 이유로 봅니다.
하나는 선수들이 AI를 대하는 자세이고,
나머지 하나는 인간이 AI에게 가진 묘한 배척감과 우월감입니다.
"하나, 선수들은 AI를 이용합니다."
알파고가 바둑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바둑기사들은 좌절하지 않고 알파고의 수를 복기하였습니다.
경기 당시 알파고의 수는 그때까지의 바둑 논리와는 맞지 않는 악수를 거듭하였고 대전자 이세돌 기사는 알파고의 수를 잘못 둔 수인 것이 아닐지 의심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충격적인 경기 결과 이후 분석과 복기를 거듭하니 인간의 관점으로 악수라고 평했던 많은 수가 오히려 승리를 위한 실리적인 수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계산력이 부족한 인간이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수를 평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오만이었던 것이죠.
이에, 알파고를 활용하여 수 이론의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있습니다.
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AI에 승리할 수 없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선수들은 AI의 수를 연구하였습니다. 또한 복기할 때도 기보를 직접 입력하여 포지션과 기물 가치를 다시 재단하는 등 AI의 기술을 흡수하여 개인의 기량을 더욱 올리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물론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승리만을 노리는 AI의 수를 따라가다 보니 각 개인의 스타일(바둑으로 치면 기풍)이 획일화되어 보는 재미가 반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 AI의 분석으로는 확률적으로 나오지 않을 신수(Novelty. 참신한 전략)를 써 AI에 학습된 전략에 의표를 찌르는 등의 변화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AI의 수를 연구하더라도 인간은 AI와는 다르게 개인의 개성, 주관이 지워질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중들은 이러한 선수들의 개인 스타일의 대결에 열광합니다.
체스를 벗어나 AI가 영향을 미치는 다른 업무로 시각을 넓혀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AI와 경쟁하여 완벽한 결과물로 앞서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는 일정 수준까지는 AI에 맡기고 그 속에서 개인의 개성 혹은 스타일을 어떻게 살릴까를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현재 체스 선수처럼 말입니다.
"중요한 것, 소비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나머지 하나의 이유는 어떤 의미로는 첫 번째 이유보다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바로 인간은 AI에 대해 묘한 배척감과 선입견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 선입견이란 AI에 감성(혹은 창의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소프트웨어를 전공하거나 기계에 대해 해박한 사람은 이를 부정할 것입니다.
인간이 감성이라고 느끼는 것 혹은 창의성이라고 느끼는 것은 결국 패턴의 영역일 뿐입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감성적이라고 느끼는 결과물,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창의적이라고 느끼는 결과물들을 AI에 입력시키고 그 결과물의 논리와 유사한 알고리즘으로 결과를 생성해 낸다면 AI도 인간이 가진 창의성, 감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AI가 인간의 감성을 흉내 낼 수 있다 하여도 그것을 인정할지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결과물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며, 인간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조나선 하이트는 그의 저서 “바른마음”에서 인간의 판단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직관의 하인일 뿐이다.”
-조나선 하이트 -
말의 뜻이 무엇이고 하니,
인간은 직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먼저 판단하고, 그 직관을 변호하기 위해 이성적인 설득을 한다는 뜻입니다. 직관적으로 옳지 않다고 느끼면 그것이 진실과는 상관없이, 무슨 이유를 대서든지 그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화장실 변기를 청소하기 위해 청소 용품을 찾아봤는데, 걸레도, 수건도 모두 세탁 중이라서 닦을 것이 없다고 가정해 봅니다. 고민하며 장롱을 뒤져보니 3.1절에 걸기 위해 사뒀던 태극기가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은 그 태극기로 화장실 변기를 청소할 수 있나요?
이 문제에 정답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태극기는 그 사람의 소유물이니 그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꽤 많은 사람이 “그건 좀....”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인지 질문을 하면 3.1절에 사용해야 하기 때문 혹은 다른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사용해야 하지 않냐고 대답합니다.
이때, 구매 후 3년 동안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고 조건을 달아도 이번에는 애국심과 상징성을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대답을 하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은 직관적인 판단(“그건 좀...”)이 선행하고 이성은 그 직관을 변호하기 위해 논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AI에 대입해 보면 결국
아무리 AI가 사람의 패턴을 학습하여 감성적인 혹은 창의적인 결과물을 제작하더라도 보는 사람은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이란 것입니다.
아마 창작자의 정보를 블라인드로 가리고 AI의 그림을 전시한다면 사람들은 창의적이고 의미 깊은 작품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체를 밝혀보니 “짜잔 AI였습니다~”라고 한다면 그제야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어”라거나 “사람이었으면 더 울림이 있을 것이다” 따위의 말을 하며 그 평가를 부정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도 두려운 것이 아닐까요.
AI에 감성과 창의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함이란 없다”라는 허무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필자는 생각합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난다면 AI가 더 발전하고 보급되면서 AI가 제작한 생성형 결과물 혹은 정보는 대량 생산되어 저가의 가격에 팔릴 것이고 사람의 손으로 제작한 것이 “장인,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프리미어 가격을 붙여서 팔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만의 고유함에 가치를 부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단순히 주장만으로는 믿기지 않겠지만 의외로 인간이란 같은 결과라도 정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에 더 가치를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내용의 다섯 줄의 편지를 쓰더라도 카카오톡으로 전송하는 것보다 손 편지로 작성해서 보내는 것에 더 의미를 보려고 하죠.
기계가 지배한 체스 세계, 그럼에도 선수에게 열광하는 관중들.
그 관중 중 대부분은 컴퓨터끼리의 체스 대결에 흥미와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컴퓨터가 두는 수는 기계적으로 완벽할 수는 있겠지만 그 수를 두게 된 서사, 이를테면 성장 신화도 공감할 만한 스토리도, 인간적인 고뇌나 개인의 철학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중이 바라는 것은 명확하게 계산된 정확한 수가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고, 그렇기에 다양한 가능성과 미래를 예측하고, 그럼에도 확신할 수 없어 고뇌하며 내린 한 수일 것입니다.
AI의 발전.
이제 막 업계에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새롭고 완벽해 보이는 그 경쟁자가 두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잃어버리기 전에 떠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완벽한 결과물보다 개인의 서사가 보이는 수를 더 가치 있게 평가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AI의 뛰어남을 긍정하고 이용하거나 모방하되, 나만의 서사를 담은 한 수를 꾸준히 갈고닦는다면 AI는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닌 나를 보조해 주는 무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