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친구, 아주 PT의 정석이네요. 한 마디, 한 마디가 머리에 쏙쏙 들어와요. 아주 논리적인데요."
"잘하긴 하는데, 머리만 치고 있어. 가슴을 때려야 물건을 팔지."
- 드라마 미생 中 오상식 차장 -
내 오리지널리티는?
필자가 한창 마케팅을 공부할 때 강사님이 내주신 첫 숙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소개였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자기소개면 숙제가 아니었겠죠.
강사님은 숙제를 내주시며 덧붙였습니다.
“명색이 마케팅 꿈나무들인데, 평범한 자기소개면 재미없고. 사물, 동물 등 다른 것에 빗대어 나를 소개해 보도록 하세요. 학력, 경력, 나이 발설은 금지입니다.”
이 과제는 참신했고, 그랬기에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왜냐하면, 이 과제에는 숨겨진 미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임팩트입니다.
단순히 비유만 하는 것이 아닌 청중들에게 나를 기억시킬 수 있는 확실한 이미지를 전달해 주어야 했습니다. 거기다 학력, 경력, 나이 등 스펙은 발설 금지였기에 오로지 나만의 스토리를 기억에 남게 빗대어 표현해야 했습니다.
‘나와 어울리는 사물 혹은 동물이라니? 그냥 닮은 것을 써서 내면 재미가 있을까?
그 사물에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하지?’
밤새워 고민했지만 이렇다 할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스펙을 제외한 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어떤 사물 혹은 동물과 비유하면 좋을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제 이름에 들어간 한자를 활용해서 동물과 비유를 했습니다만, 그냥 닮은꼴 동물을 활용한 것보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소개가 되었습니다.
강사님은 저의 발표에 이런 평을 남기셨습니다.
“문제의 의도를 잘 파악했고, 발표에 익숙하고, 정석이고, 잘했다. 그렇기에 기억에 남지 않았다.”
필자는 이 평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발표는 경험도 많고 자신이 있었으며, 나름 괜찮게 대본을 작성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족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기술적인 부분을 지적했다면 발전의 가이드라도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저는 드라마 “미생”에서 오과장(이성민 배우) 캐릭터의 대사만 떠올랐습니다.
“잘하긴 하는데, 머리만 치고 있어. 가슴을 때려야 물건을 팔지.”
그저 잘할 뿐.
막연하지만 치명적인 평가가 저를 고민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실마리를 최근 “싱어게인 – 임재범 심사평”을 보고 잡게 되었습니다.
그저 잘한다는 것은 평범하다는 것. 중요한 것은 감성
싱어게인에서 임재범은 한 참가자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노래를 잘만 했습니다. 잘한다는 것은 평범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다음에는 깊이 있고 신중한 감정 전달을 기대하겠습니다.”
신중한 감정 전달.
이 말은 청중이 공감할 수 있는 나만의 것을 표현하라는 뜻이라고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기술적으로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 중 청중이 나의 것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해야 하며 기억에 남겨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는 차별된 나만의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나만의 시각. 말은 참 쉽고 간단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나만의 시각이라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머리가 막막했습니다. 당연했습니다. 처음부터 시각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생각한다고 뿅 하고 나올 만큼 쉬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이 안 난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나를 브랜딩 하고, 마케터로서 상품을 빛나게 해야하는 미래를 생각하면 완벽한 기술보다 공감이 되는 시각이야말로 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민을 거듭한 결과 저는 생각을 약간 바꿨습니다.
이제 와서 과거를 되짚어봐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나만의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방법을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방법을 모방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니 제 최고의 멘토 체스에서 그 답의 편린을 찾았습니다.
신사 스포츠의 매너
체스는 여러 가지 지켜야 하는 매너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기보 작성입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체스 선수들은 먼저 한 수를 두고, 시계를 터치하고 이후 본인이 놓은 수의 기보를 적습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기보를 적고 수를 놓고, 시계를 터치, 이후 또 기보를 적죠. 기보는 체스말의 이니셜과 체스칸의 명칭으로 적습니다. "1. B4, kf6(첫수 백폰이 b4로 가고, 흑킹이 f6칸으로 이동)"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게임이 끝나고 난 이후입니다.
악수하고는 서로의 기보에 사인을 합니다. 서로가 둔 수를 기록하고 그것을 공식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공식 기록이 됩니다.
2018년 월드 챔피언십, 매그너스 칼슨의 기보 용지. 출처:Pablo Matrinez Rodriguez, CC. 및 Chess.com
나만의 것을 찾게 해주는 업무일지, 기보
선수들은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단순한 수의 나열로 보이는 체스 한판이 당사자에게는 이야기가 있는 영화와 같다고 말입니다.
필자는 그 말뜻을 알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년 말 업무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기획합니다. 시장을 분석하고, 경쟁사를 파악하고, 아이템을 개발하고, 반응을 살피고, 성공한다면 어떻게 더 극대화할지, 실패한다면 어떻게 보완할지, 혹은 폐기하고 새로운 작전을 세워야 할지 다양한 시도가 오갑니다. 관련이 없는 사람이 보기엔 그것은 단조롭고 지루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결과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당사자에게는 결과뿐만이 아닌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기획했는지, 실현하기 위해 어떤 소통을 했는지, 어떤 기쁨을 느꼈고 실망을 느꼈는지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드라마 스토리와 같이 당사자의 기억 속에 저장됩니다. 그 추억은 특정 공간에서 불현듯 떠오르듯이 오감을 통해 곳곳에 보관되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당사자의 업무 성공을 위한 모든 기억은 파편화되고 조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만 기억하고 그 순간을 위한 빌드업 과정, 배우들의 대사가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체스 한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킹을 포위하고 궁극적으로 상대를 이기기 위한 그 게임 한판이 하나의 스토리가 있는 영화와도 같습니다. 각자의 한 수, 한 수는 마치 대화처럼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합니다. 성공적인 수, 실수를 극복하기 위한 수, 중요한 국면을 위해 미리 준비한 포석 등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담아냅니다. 그리고 기록된 기보를 통해 또 다른 승리를 꿈꾸며 끊임없이 복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강점을 더욱 강화하고 약점을 보완합니다. 결국 ‘나만의 스타일’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 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 준다.”
- 조훈현 바둑기사
나만의 스타일이란 절대 임기응변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복기하고, 해왔던 것들의 결과물과 그 생각의 과정까지 복기가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나의 스토리’는 만들어지고 공고해진 스토리가 ‘나의 스타일’을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에 저는 여러분에게 스스로가 체스 선수가 되어 기보를 적듯, 업무의 일지를 작성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기처럼 적는 것도 좋고, 진짜 기보처럼 키워드만 적는 것도 좋고,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 대본을 적는 것도 좋습니다. 스스로가 알아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기획을 했는지와 수치적 결과가 아닌,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경위, 이루고 싶었던 개인적 목표, 결과를 얻지 못한 실패와 그때 느낀 생각, 그리고 보완점을 생각해 낸 계기 등 사소한 모든 순간순간이 여러분의 스타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