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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스드 폰 Aug 20. 2023

'지식의 저주' 전문성을 피앙케토의 시각으로 보라

체스로 보는 회사생활 교훈

“가뭄과 장마를 아는 일에는 농부를 따를 사람이 없고, 물과 풀을 아는 데에는 말을 따를 수 없으며, 더위나 추위를 아는 데에는 벌레를 따를 수 없다. 각 분야에는 제각기 전문가가 있기 마련이다. by 유기(劉基)”




한 길만을 바라보는 전문가  


사회에는 한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변호사, 의사뿐만이 아니라 회사 내에 소속되어 있는 디자인 전문가, 회계 전문가, 상담 전문가 등이 그것입니다. 소위 전문가들은 그 분야에 대해 깊이 있기 파고들기에 높은 학력과 다수의 경험을 갖추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다양한 이득을 제시하여 이러한 전문가를 스카우트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합니다. 왜냐하면 전문가는 전문 분야의 일에 관해서는 일반 사원이 생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전문가는 본인의 전문지식으로 인하여 환원주의 오류를 범할 때도 있습니다. 필자는 전문가를 보면 마치 체스의 비숍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대각선을 가로지르는 기물비숍


비숍은 체스의 기물 중 하나입니다. 비숍(bishop)의 뜻은 성직자인 주교를 뜻하는 단어인데, 그 이름처럼 가톨릭의 주교관을 쓴 성직자들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비숍의 가장 큰 특징은 대각선으로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체스판의 특징 상 대각선만 이동한다는 것은 전체 64칸 중 32칸만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비숍은 엔드게임에서 비숍 외의 다른 메이저피스가 없다면 체크메이트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제약이 있는 대신 비숍은 대각선이기만 하면 칸 수에 관계없이 갈 수 있는 장거리 기물이기도 합니다. 32칸만 가는 대신 그 32칸을 통제할 수 있는 기물. 이 특징은 제가 생각하는 전문가의 이미지에 딱 부합하였습니다.


비숍의 대각선 행마


같은 색 칸밖에 못 가는 기물

    

비숍이 대각선만 간다는 것은 재밌는 시각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같은 색 칸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체스 기물 중 유일하게 본인이 서 있던 색 칸 외의 다른 색 칸으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아군 비숍끼리는 만날 일이 없습니다. 하나는 검은색, 하나는 하얀색에 서 있고 그 색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검은색은 검은색, 하얀색은 하얀색 같은, 색을 벗어날 수 없는 비숍의 모습은 전문가의 특징인 전문성의 강점과 약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색 칸만 갈 수 있기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두 비숍



배울수록 짙어지는 선입견


우리는 흔히 듣는 교훈이 있습니다. “선입견을 갖지 말고 문제를 다각적으로 생각해라.”가 그것입니다. 

필자 역시도 어렸을 때,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해보고자 노력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입견이란 배움이 많고 깊으면 깊을수록 더 강화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아이가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인 발상을 해낼 수 있는 이유는 사물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눈은 뜨거운 열에 녹는다는 개념이 분명하지 않기에 한여름 대낮에 눈사람을 그리는 등이 그것입니다. 

배움이란 명확하지 않은 개념에 원리와 형태를 부여합니다. 형태가 고정된 개념은 이제 그 개념을 모를 때의 유연함을 포기하는 대신 지식이라는 단단한 무기가 됩니다. 이에, 아이들은 자랄수록 어렸을 때 보였던 상식을 파괴하는 순수한 창의성은 점점 없어지며 대신 이론과 논리의 완숙함이 짙어집니다. 이것을 누군가는 슬퍼할 수도 있으나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전문가는 어떨까요? 

전문가는 일반 사람들보다 더더욱 지식에 파고드는 사람입니다. 파고든 지식을 자신과 집단을 위해 휘두를 수 있는 날카로운 칼로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담금질을 합니다. 날카롭고 정확함을 추구하기에 논리를 비틀어야만 나오는 획기적인 창의성이 나타날 틈은 거의 사라집니다. 그 대신 업무에 일어나는 이슈를 특정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타인보다 더 명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전문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때로는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이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 지식에 갇히는 일명 ‘지식의 저주’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색 칸을 벗어날 수 없는 지식의 저주’, 환원주의



“여러분이 파리학과를 졸업하고 입사한 파리학사라고 가정해 보자. 파리에 대해서 전문지식이 부족한 파리학사는 파리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파리의 특정 부위, 예를 들면 ‘파리 뒷다리’를 전공한다. 파리 뒷다리 전공자에게 파리 앞다리를 물어봐서는 안된다. 파리 뒷다리 전공자는 파리 앞다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박사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파리 뒷다리에서 더 전문적인 ‘파리 뒷다리 발톱’을 전공한다." by. 유영만 교수



필자가 사회복지를 공부할 때 분석단위의 오류 중 환원주의를 주의하라는 배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환원주의란 본래 복잡하고 높은 단계의 사상이나 개념을 하위 단계의 요소를 세분화하여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다고 정의하는 견해입니다. (출처: 위키백과)

이를 응용하여 사회과학에서는 인간과 사회의 현상을 하나의 전문적 이론으로만 해석하는 오류로 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심리학자가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현상을 심리적 요인의 작용 결과로만 본다거나 경제학자가 모든 사회 현상을 경제적 요인이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전문지식을 갈고닦으면 닦을수록 생각의 알고리즘,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 장기적인 시각이 그 지식과 동화되어 마치 서 있는 칸 색 외에는 다른 색을 갈 수 없는 비숍처럼 전문지식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가히 지식의 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멀리 빠르게 보는 전문가의 피앙케토전문성


그렇다면 지식의 저주에 걸리지 않게 전문지식을 깊게 공부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인가? 전문가란 사실 허상인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의 저주. 즉, 전문성은 전문가에게 실이기도 하지만 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전문성은 특정 전문지식으로만 생각하게 하는 대신 그 방향으로 더 먼 미래를 예측하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숍에게는 피앙케토(Fianchetto)라는 전술이 있습니다. 피앙케토란 비숍을 한 칸 올려서 가장 먼 대각선(상대방 룩의 위치)을 겨누는 체스 기술을 의미합니다. 장거리 기물이라는 특징을 활용하여 상대방에게 강한 압박을 주고 비숍의 대각선을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상대방의 룩을 피앙케토 하고 있는 두 비숍


피앙케토는 체스에서 가장 먼 거리를 조준할 수 있는 전술입니다. 대각선, 같은 색 칸만을 이동하는 특징을 갖고 있기에 역설적으로 비숍은 다른 어떠한 기물보다도 장기적인 시각으로 판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피앙케토가 전문가의 전문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성이란 그 지식 밖의 세상을 보는 것을 어렵게 하지만 그 지식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세상은 일반사람보다 훨씬 먼 거리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마치 비숍의 피앙케토처럼 말입니다.


나의 전문성을 자유자재로 통제하여 피앙케토로 만들어라


비숍의 피앙케토는 체스판에서 여러 다양한 전술로 응용할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디스커버드 어택(Discovered Attack)입니다. 디스커버드 어택이란 공격을 가로막고 있는 기물이 이동하면서 가려져 있던 기물이 공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래의 이미지를 보시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비숍을 가로 막고 있던 백나이트가 움직이면서 비숍과 나이트가 협공을 하고 있다. 이를 디스커버드 어택이라 한다.


이 디스커버드 어택은 비숍 외에도 다른 장거리 기물(이를테면 퀸, 룩 등)도 가능한 전술입니다. 하지만 비숍의 피앙케토를 연계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전술이기도 합니다.

이미지에서 비숍은 피앙케토를 했으나 나이트로 인하여 움직임이 방해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트가 움직이는 순간 비숍의 장거리 저격과 나이트의 기동성이 한 움직임이 되어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피앙케토는 단지 바라보는 것이 아닌 어떻게 활용할지에 따라 효과적인 전술이 될지 아니면 계륵 같은 배드비숍(bad)이 될지가 결정됩니다. 


전문성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갖고 있거나 혹은 나의 팀원의 전문성 갖고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미래를 통찰하는 성능 좋은 망원경이 될지 상황을 편협하게만 바라보고 본질과 관련 없는 것들만 바라보는 고장 난 망원경이 될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지식의 저주의 앞과 뒤를 명확하게 알고 상황에 따라 나 또는 동료의 전문성을 적절히 활용하여 내가 보지 못하는 칸은 다른 누군가와 협업하는 유연함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적의 진형을 뒤흔드는 멋진 비숍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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